(886)<제32화>골동품 비화 40년(27)|박병래(제자 박병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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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군자다운 화풍>
그림을 모으다보면 이상한 종류의 것도 손에 걸리게된다. 즉 점잖은 산수나 인물뿐이 아니라 숨어서 볼 수밖에 없는 물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아주 노골적으로 남녀가 놀아나는 그림은 대개 그 필치가 치졸하다. 별로 이름이없는 화가가 호구지책으로 그린 듯한 물건들이 많다.
내가 본 이런 종류의 그림은 거의 전부가 화첩으로 엮어있었는데 가진 것은 없다. 내가 남달리 결백했다거나 천주신도로서 그런 것을 갖는데 도덕적으로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림으로서 좋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 잘 그려진 것이 있으면 실례를 무릅쓰고 위창 선생에게라도 보여들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기회는 한번도 없었다.
사실 나는 우리나라 그림이 같은 시대의 서양 것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것보다도 떨어지는 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인물을 벗겨서 그리지 못했던데 있었다고 본다. 여하간 우리는 그림을 통하여 보아도 동방예의지국이었다.
지금 단원이나 혜원으로 대표되고 있는 풍속도라는 그림은 당시로서는 도학군자의 빈축을 샀던 아주 지나친 그림이었다. 지금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있는 혜원의 것이 특히 그런 편이다.
내가 본 이런 종류의 그림으로 흔히 세상에 안 알려진 것으로 서울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북된 이인영씨의 것이 생각난다. 누가 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부세회」라 해도 좋을 것이다. 도포를 입은 선비가 어느 여인과 노는 몇 장면을 그린 화첩이었는데 그 솜씨가 볼만하였다.
이인영씨가 이 그림을 살 때에는 그분의 선친께서도 살아 계셨으며 값이 비쌌기 때문에 그 돈을 타내려면 어른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큰 용기를 내어 이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선친은 웃으면서 그림이 좋더냐는 한마디만 묻고 바로 승낙했다는 것이다.
그 얼마 후에 나도 현재 심사정이 그린 이런 종류의 화첩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상이 권고했지만 선뜻 갖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내 위인이 시원치 못해서가 아닌가도 생각했지만, 별로 흥미가 없었다.
이런 그림은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젊었을 때 더러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그 분은 원래가학자인지라 민속자료로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지만 역시 그 효과는 일거양득이었다는 농담도 하셨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한국사람이 역시 염치를 차리는 편이라고 하였다. 아마『왕조실록』에 있는 이야기라고 들은 듯한데, 청이 일어나고 명이 망할 무렵에 명의 장수인 모문룡이란 사람이 우리나라의 단도라는 섬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청을 쳐서 명을 일으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청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는데 섬겨오던 처지라 거절도 못한 채 모문룡을 맞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모문룡이 우리 조정에 보낸 선물이 바로 그런 물건이었다. 우리정부에서는 이것을 받을 것이냐, 퇴할 것이냐로 회의를 열고 야단을 할 정도로 중대문제로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어찌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정도로 중국과 우리와도 그런 물건에 대한 태도가 달랐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지만 내가 가진 그림가운데 단원의 것과 현재의 것에 악기가 나오는 것이 있다. 오 모라고 당시 서화를 취급하던 분에게 돈까지 주었는데도 영영 물건이 들어오지 않았다. 참다못하여 물어보니 내 친구 S씨가 나에게 전하겠다고 가져갔다는 것이다. 바로 S씨를 찾아 내 그림을 내라고 했더니 자기에게 양보하라는 것이다. 싸우다시피 하여 겨우 뺏어왔지만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물건에 욕심이 생기면 경우가 없어지는 법이구나 생각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 어디서 들었는지 이혜구씨가 그 그림을 자기에게 양도해달라는 청이 있었다. 한국의 고화 가운데 악기가 있는 것이 드물며 자기는 우리 음악사를 연구하기 때문에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참 거절하기 어려운 청이었지만 나는 냉담하게 잘라 말했다, 아주 두 말이 못나오도록 거절했으므로 다시는 그런 말을 안 들었지만 그분에게는 좀 미안하게 됐다는 생각도 난다.
우리 집을 새로 짓고 도배를 할 때에 나는 위창 선생의 것을 다락문의 정면에 4장쯤 붙일 생각으로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안종원씨의 것, 그 옆에 또 누구누구하는 식으로 마음속으로 정해놓고 모두 글씨도 받아놓았다. 원래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으므로 따로 사례도 없었으며 드려도 받지도 않던 때의 일이다.
그런데 도배를 할 무렵에 S형이 자기의 글씨를 준비해 가지고 가운데 붙여버렸다. 물론 그분의 글씨도 좋고 당시에도 이미 이름이 있었지만 연배로 보아 위창 선생과는 다르기 때문에 나는 옆에 붙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본인이 자진해서 그러는데는 말릴 도리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다. 한 장에 얼마라는 시세에 따라 써주는, 요즈음 세상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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