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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열정 식었다" 교수직 던진 퇴계 후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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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해 12월 31일 대구 범어동 일식집. 두 대학교수 가족이 마주했다. 이미 가족끼리 아는 사이였건만 침묵이 흘렀다. 이 자리에 있는 이원경(59) 영남대 기계공학부 교수가 정년을 거의 7년 남기고 느닷없이 명예퇴직서를 낸 직후였기 때문이다. “강의할 열정이 사라졌다”는 이유였다.

 함께 있던 같은 학교 김용찬(58·수학교육과) 교수가 이 교수의 부인에게 말을 건넸다.

 “이 사람과 살아온 것 후회하지 않습니까.”

 “후회 않는다”란 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김 교수는 이 교수의 아들을 보며 말했다. “네 아버지, 존경한다.”

 동료 교수로부터 “존경한다”는 말을 듣는 이원경 교수. 그는 정년 65세를 6년여 앞두고 지난해 말 명예퇴직 신청을 했다. 그가 대학 측에 밝힌 퇴직 이유는 이랬다. “열정이 사그라들었는데 교육자로서 양심상 어떻게 강단에 남아 있겠느냐. 더 열정 있는 후배들이 들어오게 하는 게 맞다.”

 사실 그에게 ‘열정 없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동료 교수와 제자들은 평했다. “대쪽 같은 성격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들 했다. 휴강은커녕 강의 시간에 늦는 법조차 없었다. 2012년엔 대학이 주는 ‘강의 우수상’을 받을 정도였다. 제자 안동현(23·첨단기계전공 2년)씨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는 항상 열정적이었다, 시험문제는 어렵고 학점도 후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를 풀고 나면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 강의가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노석균(59) 영남대 총장은 이 교수를 직접 만나 나가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필요하다면 안식 휴가를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허사였다. 이 교수는 “결심이 바뀌기 전에 수리해 달라”고만 했다. 아직 명예퇴직 신청이 공식 처리된 것은 아니지만, 이 교수의 뜻이 완강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영남대 측 설명이다. 이 교수는 ‘고고한 선비의 표상’인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후손이다. 영남대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사,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를 받았다. 1980년 모교에 교수로 돌아왔다.

 세상을 원칙대로 살았다. 김용찬 교수와 학교 인근 산을 등산하려던 때였다. 학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산을 넘으려던 참이었기에 김 교수는 태워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또 다른 교수에게 태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이 교수가 “우리가 등산하는데 왜 연구하는 동료에게 폐를 끼치느냐”며 나무랐다. 김 교수는 “별생각 없이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종종 비정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게 바로 이 교수”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휴대전화·자동차·골프채가 없는 ‘3무 교수’로도 불렸다.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수시로 울리는 휴대전화와 골프채는 연구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장만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이 시점에 물러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왜 열정이 식었을지 그저 추측할 뿐이다. 동료 교수들의 생각은 이랬다. “몇 년 전 만 해도 3명 박사를 배출하면서 참 잘한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그 뒤론 대학원생을 받지 못했다. 이공계 기피 때문이었다. 학부생만 데리고서 하기엔 어려운 수학을 이용해야 하는 이 교수의 전공 연구에 한계가 있다. 그러면서 연구열이 식었고, 더불어 강의열도 전만 못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정년을 누렸을 텐데….”

 이 교수는 왜 물러나려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보려는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e메일로 짧게 생각을 밝혀 왔다.

 “학자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발견을 해서가 아니라 퇴직과 관련해 주목을 받는다는 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부디 저에 대한 관심을 접어 주시길 바랍니다.”

대구=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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