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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말라" "공인 책임 다해야" … 연예계 '일베' 주의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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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는 ‘일베’ 용어, 알고 절대 쓰지 맙시다.”

최근 개설된 인터넷 사이트 ‘일베 용어 사전’(ilbescreen.com)의 소개글이다. 보수성향이 강한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ㆍwww.ilbe.com)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사이트다. 일베에서 쓰이는 특정 단어를 모아서 소개하고 있다. 혹시 누군가 어떤 글을 쓰고 거기에 일베 용어가 포함되어 있는지 궁금하다면 확인해 볼 수 있는 기능도 포함시켰다.

‘일베 용어 사전’이 만들어질 정도로 일베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됐다. ‘일베 용어 사전’ 사이트를 개발한 이는 리얼리티쇼 ‘더 지니어스2’(tvN)에 출연 중인 해커 이두희씨다. 그는 트위터에 "일베 용어 자동 필터, 나도 모르게 쓰는 일베 용어 때문에 괜한 오해를 받아서 '훅 가는 거' 방지용"이라고 올렸다. 이를 만든 동기가 주목할만하다. 그의 동료 출연자인 전 프로게이머 홍진호씨가 지난 7일 자신의 트위터에 영화 ‘변호인’을 보고왔다며 “추천들이 많았던만큼 재미도 있었고 몰입도 잘한듯. 다만 영화 주제가 그러하듯 조금 씁쓸찌릉찌릉하는 거만 빼면”이라고 올린 것이 논란이 되면서다.

 

일부 네티즌은 ‘찌릉찌릉’이 일베 용어라며 그를 공격했고, 홍씨는 “일베 안해요.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라는 글을 올렸다. 네티즌 사이에서는 "‘찌릉찌릉’이 전라도 특산 음식인 홍어 냄새를 비하한 것이다"라는 주장과 "일베 용어 자체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맞붙기도 했다.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일베 용어와 관련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가수 김진표씨가 ‘운지’(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말) 등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아빠 어디가2’(MBC) 출연을 앞두고 반대 논란에 부딪쳤다. 댄스그룹 ‘크레용팝’은 일베를 상징하는 손동작을 했다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엔 가수 시크릿의 전효성씨가 ‘민주화’란 말을 일베식으로 사용했다가 공식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요즘 방송ㆍ연예가에 ‘일베 주의보’가 떠도는 배경이다.

일베는 지난 2010년 유머 글을 게시하는 사이트로 시작했다. 이 사이트를 분석한 걑일베의 사상걒(오월의 봄)이란 책도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일베는 2012년 대선을 분기점으로 선명한 보수 사상을 드러냈고 그것을 자신들만의 유머 코드로 버무린 콘텐츠로 생산하면서 대형 사이트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진보ㆍ호남ㆍ여성 등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신조어가 잇따라 일베에서 만들어져 인터넷을 통해 확산됐다. 걑일베의 사상걒을 쓴 박가분씨는 “일베 회원들이 커뮤니티 밖에서도 일베 용어를 사용하고 전파하면서 많은 네티즌의 프레임을 지배하는 양상을 보이게 됐다”고 설명한다. 즉 그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른 사이트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일베 용어가 일상화됐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무심코 일베 용어를 사용한 연예인들이 ‘마녀사냥’식 과도한 비난을 받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양대 진중권 교수는 트위터에 “일베를 비판하기 위해 반대편에서 또 다른 일베가 될 필요는 없다”며 “일베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베충’(일베 회원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몰아갈 게 아니라, 그게 일베 용어임을 알려주는 선에서 멈춰야한다”고 지적했다.

이념 성향이 서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 간 주도권 싸움에 연예인이 끼어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베 회원이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적 낙인찍기를 해왔던 것처럼, 그 반대 방향의 공격이 일베 용어를 별 생각없이 사용하는 이들에게까지 가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엔 일베에 대항하기 위해 ‘일간워스트’(일워ㆍwww.ilwar.com)가 개설되기도 했다.

걑우리는 디씨걒(이매진)의 저자인 인류학자 이길호씨는 “진보와 보수의 진영 싸움이기도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 10년의 역사를 봤을 때 헤게모니 싸움이기도 하다. 엎치락 뒷치락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예인의 공인으로서의 책임의식도 지적된다. 일베 용어가 특정인을 비하하고,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좀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재승 교수는 “사용하는 단어는 그 사람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용어를 쓰면 그것이 우발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또 다른 논란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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