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사서와 고대사 인식체계』-한국사연구회 이만열 교수 발표논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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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사의 고대사를 서술하는 태도에 있어 주체적인 입장을 강조한 선인들의 노력은 학계에서조차 많이 감춰져 있는 감이 있다.
민족주체사관이 오늘에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의 정신적 뿌리는 깊다고 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일연의 『삼국유사』·이승휴의 『제왕운기』등에서도 그 정신은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후기 17, 18세기의 사서들에서도 그 맥박은 살아있는 것이다.
이만열 교수(숙명여대)는 20일 하오 서울대 문리대에서 열린 한국사연구회의 제41회 월례발표회에서 『조선후기 사서와 고대사 인식체계』를 발표, 조선후기 즉 17, 18세기의 사서들에 나타난 당시 사가의 역사의식과 새로운 고대사 인식체계의 특수성을 소개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로부터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시기에 나온 사서에는 오운(1540∼1617년)의 『동사찬요』, 유계(1607∼1664년)의 『여사제강』, 홍여하(1620∼1674년)의 『휘산려사』와 『동국통감제강』, 그리고 임상덕(1683∼1719년)의 『동사회망』과 안정복(]712∼1791년)의 『동사강목』이 있다.
그리고 비록 사사는 아니지만 『수산집』에 실린 수산 이종휘의 「동사」나 성호 이익(l681∼1763년)의 사관은 모두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오운은 『동사찬요』전8권에서 16항목의 법례를 두고 역사서술의 태도를 밝히고 있는데 가령 권선징악의 강조, 역사를 보는 눈의 중시가 두드러진다.
또 유계는 『여사제강』 23책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믿을 것이 못되며 또 『고려사』는 산만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강목체의 고려사를 찬술한다고 밝히고 있다. 홍여하는 『휘찬여사』를 가문 안에서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47권으로 편찬했는데 대체로 고려사의 축소형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열전의 성격을 분명히 해서 우왕과 창왕도 고려종실에 포함시키는 객관성을 보였으며 범례에선 통치가 바른 것을 내세우는 정신이 역사서술에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고 「외이열전」도 두어 우리 역사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특히 『동국통감제강』에서 처음으로 우리의 전통론을 들고 나오고 있으며 삼국 이전의 기록을 권1에서 다루고 있어 우리 역사의 오랜 연원을 내세우고 있다.
임상덕은 『동사회강』에서 역시 전통론을 내세우고 본기에 신라부터 서술하고 있으나 부기에서 삼국 이전의 우리 역사를 쓰고 있으며 강목체로 서술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우리 민족이 자기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을 비판하고 아울러 역대의 역사서술 태도를 비판하면서 서에서 시비를 바로 하는 것, 충절을 높이고 전통을 세우는 것, 대의명분을 내세워 강목체의 서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살핀 이 교수는 이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추출했다.
①형식면에서의 범례를 보편화했다. 이전의 관찬사서들은 서표 중심인데 비해 사론과 사관을 넣는 형식으로서의 범례를 세운 것은 특징적이다. 물론 이전에 『동국통감』에서도 범례를 넣어 역사서술의 방향을 보였으나, 이는 주자의 강목은 따른 버릇이었을 뿐이었다.
②역사기술에서 강목체가 등장했다. 중국의 편년체의 일종이나 대의명분을 강조하고 전통과 전적을 구분하는 특성을 구사했다.
③내용면에서 조선정권의 합리화 기술태도를 완화했으며 계통을 밝히고 대의명분을 살리려는 전통론의 서술이 나타났다. 『동국통감제강』(1672년)에서 처음 전통론이 나온 것은 중요한 사실이며 이때 기자조선-마한-신라로 이어지는 고대사 체계도 나왔으며 단군을 기자의 위에 두는 범례도 나왔다.
홍여하에 이어 성호 이익도 삼한 전통론을 강조하고 우리 나라와 중국사가 방불한 계통을 가져 단군과 요, 기자와 주무왕, 마한과 한 등을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주장, 한·중의 대등한 역사발전을 내세운 자주성을 보였던 것이다.
성호에 이어 순암 안정복은 전통론을 이어받고 주체적 역사의식을 강조했으며 『중국도 대지중의 한 조각 땅덩이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각국의 독자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 같은 17, 18세기의 역사서술 정신은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가?
이 교수는 ①임난 이후 사회발전의 영향 ②서양문물이 들어와 세계관이 확대된 것 ③역사서술방식이 강목체로 바뀐 시기와 관련이 있음을 들면서, 특히 명이 망하고 청이 등장한 시기에 자기인식이 심화가 이루어지고 중국중심의 세계관의 탈피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봤다.
순암의 사관은 이어 다산 등에도 연결되는 것이며 오늘의 민족사관으로도 계승되는 것이랄 수 있는 것이다. <공종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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