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노벨」수상자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73년도「노벨」문학상을 받게된 세 학자는 모두 87세, 70세, 66세의 노인들이다.
「노벨」상은 공로상은 아니다. 따라서 30대에 수상한 학자들도 많다. 이번에 수상한 세 노학자도 젊었을 때의 공적이 이제서야 인정받게된 것은 아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꾸준한 연구에 대한 평가의 결과인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재란 대개가 조숙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 예도 많기는 하다. 「모차르트」는 6세 때 연주회를 열었다. 「괴테」는 8세에 창작을 했으며,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시를 써 보낸 것은 9세 때의 일이다.
그러나 조숙아가 반드시 천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조숙아는 3세에 책을 읽을 수 있게 된다. 12세 이전에 고교를 나오고 18세에 박사학위를 받는 조숙아도 서양에는 흔히 있다.
이들의 지능지수는 대개 1백80이 넘는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조숙아의 얘기를 가끔 듣는다.
이상하게도 이런 지능우수아들에게서는 인류문화에 공헌할 만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천재들이 나오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송과선의 장해로 정신적 조숙이 일어나는 수도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늦동이 천재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5세가 될 때까지 말도 잘못했다. 학교성적도 시원치 않았다.
그렇던 「아인슈타인」이 천재로 자라날 수 있던 것은 그 자신의 노력은 물론이지만, 환경의 힘도 컸다고 봐야 옳다.
만약에 천재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천재의 창조력을 더욱 자극시켜주는 외적조건이 없다면 「아인슈타인」만한 천재들도 모두 단순한 지능우수아로 끝나고 말 것이다.
70대, 80대의 노학자들이 아직도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뭣보다도 그들이 건강한 때문이다.
그러나 뭣이 그들로 하여금 젊은 학자들에 못지 않게 왕성한 지적 탐구심을 지닐 수 있게 만들었을까? 그들에게 아직도 강좌를 맡겨주는 대학이 있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암시를 「니콜라스·틴베르헨」교수에게서 받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는 지난 69년에 최우수기록영화상을 받은 작품을 직접 제작했다. 그의 나이 63세 때의 일이다.
그의 생활의 폭이 그만큼 넓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네 주변에서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데서 우리네 지식사회의 부모를 배태한 까닭을 찾아낼 수 있을 것만도 같다.
진리에의 길은 멀고도 험준하다. 한 갈래 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양의 학자들은 둘레의 풍경을 완상해 가며 차분히 걸어 나간다.
우리네는 그렇지가 못하다. 가장 쉬운 길, 가장 빨라 보이는 길을 단숨에 뛰어가려 애쓴다. 길목의 풍경을 즐길 여유가 전혀 없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점수위주의 메마른 교육제도 말고서도 또 많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