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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67)|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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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허가이의 숙청>
김일성은 1950년 12월 21일에 개최된 재3회 중앙위원회 소원회의에서 자기의 수족인 김일 임춘추 최광 등을 철직 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밀리는 처지에 있었다. 특히 패전을 계기로 하여 소련파의 허가이와 남로당의 박헌영이 접근하는 기세에 김일성은 자기의 정치적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북한에 진격해 와서 북한천지를 점령하고 있는 중국인민지원군의 팽덕회 사령부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때까지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모든 것이 소련지배하에 있었는데 소련군이 철수한 후에 중공군이 대신으로 점령하게 되자 중-소 관계에 미묘한 움직임이 생기게 되었다. 중공 파가 대두하게 되고 소련파는 중공군사령부와 호흡이 잘 맞지 않게 되어 갔었다.
북한 내 여론이 최고책임자인 김일성에게 전쟁책임을 묻는 형편으로 돌아가고 점점 박헌영의 명가가 높아갈 뿐 아니라 이때까지 자기를 보좌하여 오던 허가이까지 박헌영에 접근하여가니 김일성은 군사적으로 위로부터「쿠데타」를 일으켜 박헌영·허가이를 숙청하지 않고는 자기세력을 만회할 수는 없었다. 특히 허가이와 박헌영이 있는 한 김일 임춘추 최 광의 복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서는 소련세력을 물리치고 북한에서「헤게모니」를 잡으려면 친중적으로 돌아서는 김일성 파를 이용하며 그에 반대되는 세력인 소련파와 남로당 파를 숙청할 필요를 느껴 김일성 파와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북한에 있어서 비로소 중-소 대립이 생기는 것이다. 북한이 폐쇄된 지역이기 때문에 세계의「저널리스트」들은 이러한 북한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중-소 논쟁」이라 하였으나「중-소 논쟁」이 있은 후에「중-소 대립」이 생긴 것이 아니고, 먼저 북한에서「중-소 대립」이 생긴 때문에 뒤에 전반적인「중-소 논쟁」이 생긴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중-소 침입이 발생하고 국내적으로는 김일성은 중공연합세력에 의한 소련파·남로당 파의 숙청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953년 이른봄에 김일성은 중공연합 파는 남로당숙청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먼저 남로당과의 연합세력이며 그 비호자인 허가이를 먼저 숙청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허를 제거하기 위한 협정을 53년 초봄에 평양북방 약30km의 지점에 있는 순 안의 견용 저수지(관개용)가 미 공군의 폭격에 의하여 둑이 터져 그 일대에 때아닌 대홍수가 났을 때 마련되었다.
김일성은 중공군과 미리 짜 가지고 견용 저수지의 둑 수리공사의 책임을 허가이에게 맡겼다. 수리공사장에는 중공군이 자진하여 참가했었는데 이들은 사사건건 허가이에게 싸움을 걸었다. 수리공사의 총책임자 허가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수리에 필요한 물자도 보급하여 주지 않고. 그것뿐만 아니라 자진 협력하고 있는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하여 한마디의 인사도 없으며 현장에 한번 얼굴도 나타내지 않으니 이것이 웬일인가? 하는 항의문을 김일성에게 제출하였다.
이것을 기다리고 있던 김일성은 이 문제를 큰 문제로 삼아 허가이를 사문위원회에 걸기로 하였었다.
이 사문위원회는 허가이에 대하여 견용 저수지의 수리공사의 감독태만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소위「폐문주의문제」등 종파문제도 취급할 현세였다.「폐문주의문제」라는 것은 UN군이 북한을 점령하였을 때 당선에서 이탈하여 분원의 임무를 포기한 자들의 당원 재등록에 있어서 당의 조직문제를 책임지고 있던 허가이가 엄격한 태도로 재등록사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북로당원의 많은 부분이 당원자격을 상실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남에서 월북한 남로 당원은 이남에서 태도가 불분명한 자도 관대하게 당원 재등록을 하여주는데 북로당원에게는 왜 엄격히 하느냐는 것이 출 당당한 김일 임춘추 그리고 그들의 두목 김일성의 항의였다. 후퇴시기에 약간의 과오를 범하였다고 하여 아무 구제대책도 세우지 않고 백 전의 간부들을 무자비하게 출 당 시켰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김일 임춘추 최 광 등에 대한 처리가 가혹하며 종파적이라는 말이다.
김일성 파는 중공군과 손을 잡고 그 후원으로 평양시를 중공군으로서 꽉 눌러 소련파 군인들이 꼼짝못하게 하였다. 허가이의 장인은 인민군 중장으로「탱크」부대의 부대장으로 있었으나 중공군 때문에 평양에의 길을 차단 당하여 있었다. 그리하여 허가이를 사문위원회에 회부하는 동시에 남로당 파에 대하여서도 먼저 제일 약한 시인 임화(당시 조·소 문화협회 부위원장)를 잡아 고문을 하며 한편으로는 이승엽이「스파이」라고 말해 주면 후히 대접하겠다고 회유하였다.
사문위원회는 곧 이어 임화가 이승엽과 같이「스파이」행위를 한 사실을 자백하였다고 하여 이승엽·배 철·조두원·박승원 등을 먼저 체포하였었다.
이것을 알게 된 허가이는 김일성에게 기선을 빼앗긴 것을 알고 김일성과 중공군에 항거하기 위하여 자기사무실에서 사문위원회에 출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한다. 그런데 허가이가 자기사무실에서 총기로 자살하였다는 소문을 김일성 파가 당내에 퍼뜨렸다.
그런데 사실은 허가이가 자살하였다는 것은 의문이며 허가이가 최후까지 김일성의 비 업적인 사문위원회에 출석 안 하겠다고 버티자 김일성 파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이승엽과 같이 잡힌 사람들은 조일명(두원), 임화, 박승원, 이강국, 배 철, 윤순달, 이원조, 맹종호, 설정식, 조용복, 백형복 기타 이승엽과 아무 관계도 없는 김광수 등 남로당 출신의 수십 명의 간부들이 모조리 체포되었었다.
정말 무법천지에서 무기를 가지지 못한 남로당 간부는 거의 전원이 체포당하였다. 김응빈은 군사분계선 근처의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탈출하였으나 잡혀 죽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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