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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경림<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최근의 우리사회의 도덕적·문화적 타락의 제 양상은 자못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다. 마침내 사회과학자들이 창조적 탐구를 포기하고 현실에 대한 사후적 축조승인에 허둥대도, 예술가들이 현실 도피적인 작품을 만들어 일반민중이 진리를 이해하고 발견하는 일을 방해하고 왜곡해도, 또 「매스·미디어」가 지각을 마비시키기에 족할 오락물을 공급, 일반민중의 지적 사고력을 체계적으로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어도 어느새 이것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여지게끔 되었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시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문학의 원초적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본다.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몇 마디 말재주로 독자를 우롱하는 따위 시가 횡행할 수 있는 타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듯이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나 발전으로 하여금 정체에 대신케 하고 문화에 의해서 야만에 종지부가 찍히는 사회를 향한 전진에 공헌하는 것만이 지적 노력의 가장 고귀하고 또한 유일하게 올바른 기능이 아닐까 생각할 때 적어도 시가 이사회의 도덕적·문화적 타락의 과정에 있어 한몫을 담당하거나 그것을 부채질하는 것이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신석초씨의 『할머님』(월간중앙)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문제를 생각케 해준다.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모든 사람의 관심이 오로지 경제적 부내지 외연적 확대에만 집중되어 있는 현실에 있어 인간성의 회복이란 사회정의의 구현과 무관한 것이 아닌 까닭이다. <배가 아프다는 손주의 배를 쓰다듬어 주시며 내 손은 약손이지 하고 환히 웃으시던 할머님>은 이미 우리에게서는 잃어진 것이요, 그리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감상주의적·복고주의적 발상은 그것이 인간정의 회복 또는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한 계기가 되지 않는다 할 수는 없겠으나 엄격한 의미에 있어 이 사회의 문화적 타락과 표리의 관계를 이룰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시는 또한 내용과 일치되는 평탄하고 맑은 시어 및 시 형식으로 해서 쉽게 가슴에 호소해 오는 대신 「데상」에 그친 흠도 없지 않다.
황명걸씨의 『돌아와』(신동아)는 최근의 이 시인의 심경의 일단을 엿보는 듯 싶어 자못 흥미가 있다. 이시는 돌아온 탕아의 변이오, 새로운 결의의 표백이기도하다. 이 시인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한 계기가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참 멀리 우리는 떨어져 있었다>고 그는 고백하고있지만 그동안의 그의 시가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자기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감은 없지 않았을망정 <너무 오래 내가 당신들을 저버리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있다.
이것은 앞으로의 그의 전개가 과거의 작업에 대한 철저한 정산 위에서가 아니라 포용확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당위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 시에 있어서 거의 허장성세가 없는 솔직하고 소박한 표현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바, 그에 관한 한 반드시 새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박진환씨의『걸인』(현대시학)에서 우리는 험난하고 사악한 세상을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게 된다. 군더더기가 붙지 않은 직설적인 표현, 가령<불행한 것은 가난이 아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는 일이다>등은 상식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서슬이면서도 매우 힘차고 설득적이다.
또한 <나를 감추던 누더기의 허울도 벗어 던지리라 죽어서 산 자의 벗이 된 이들의 말씀을 동냥하고 내 가진 것 중의 가장 귀한 것을 남에게 줄줄 아는 나는 한 평생 걸인이 되리라>등이 시의 곳곳에서 우리는 구도자적 모습에 접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 자칫 빠지기 쉬운 과장과 허세에서도 용케 구제되고 있는 것은, 이 시에 나타나고 있는 진실에 대한 집요한 추구에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주인공이 외계로부터 사상적 심정적으로 양분을 섭취해서 성장 진보해 가는 이른바 교양 소설적 전개도 이 시에 있어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잠언이 곧 시가 될 수는 없다.
잠언의 세계는 상식의 울타리 안의 세계요, 시의 세계는 그 밖의 세계인 까닭이다. 이 점은 끝내 이 시의 약점으로 남는다. 이밖에 박희진씨의 『무등산장에서』(월간중앙), 김철규씨의 「가을물빛』(시문학), 성권영씨의 『민들레』『춘궁』(시문학)등이 인상이 깊었던 작품들로서 꼭 언급하고 싶었으나 지면 관계로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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