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역사 서설(序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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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설(序說)/이븐 할둔 지음, 김호동 옮김/까치, 2만5천원

"그의 작업은 의심의 여지없이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누구에 의해 논의된 것보다 가장 위대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역사 서설' 의 저자인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1332~1406)에게 바쳐진 찬탄이다.

이것이 서구의 대표적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발언임을 유의해둘 필요가 있다. 또 역사가 로버트 프린트는 14세기의 이븐 할둔을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서구사회의 큰 이름들과 비교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역사 이론가로서 그는 3백년 뒤 지오바니 비코가 태어날 때까지 어느 시대에서도 그와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아우구스투스도 마찬가지다."

이건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이 두 페이지에 걸쳐 이븐 할둔을 소개한 내용 중 몇대목인데, 실은 맨 앞 구절의 한마디 말이 더 인상적이다.

"아랍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세 아랍의 지성 이븐 할둔에 대한 이런 평가는 1868년 프랑스에서 이 책 완역본이 서구에 첫선을 보이면서부터 형성된 공감대다.

그렇다면 서울대 김호동(49.동양사학과)교수의 공들인 번역에 의해 선보인 '역사 서설'의 출현은 한국사회의 이슬람권 이해와 접근이 그만큼 성숙했음을 알린다. 시사적 관심의 차원에서 역사문화적 차원으로 변화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책 외에 최근 2~3년 새 소개된 이슬람 원전으로는 14세기에 만들어진 첫 세계사인 라시드 앗 딘의 '집사-부족지1'(김호동 옮김, 사계절)과 '이븐 바투타 여행기'(정수일 옮김, 창작과 비평사)등을 꼽을 수 있다.

무려 7세기 전의 역사철학이라지만 '역사 서설'은 요즘의 학술서처럼 뻑뻑하지 않다. 외려 구수한 대목이 적지 않다. 도입부를 보면 역사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표현대로 "시정의 평민들도 알려고 하고 왕과 지도자들도 앞다퉈 갈구하는" 읽을거리였다. 문제는 이븐 할둔이 보기에 대부분의 역사책이 학문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조개껍질과 땅콩이 뒤섞였고, 길잃은 가축이 양떼 속에 섞여든" 결과라고 호되게 비판한다.

이븐 할둔은 야심만만하다. 자신이 새로 구상하는 '문명에 관한 학문' 역사학이란 "인류문명과 사회조직을 다룬 완전히 독창적인 학문"이라고 선언(66쪽)한다.

유사한 책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있을 뿐이나 "다른 주제와 뒤섞여 철저하지 못한 책"이라며 한 수 아래로 본다. 그런 자신감의 열매가 이 책이다.

이 책에는 19세기 이후 거의 모든 사회과학 영역이 차례로 언급된다. 분야로 따지면 국가론(3장).경제사회학(5장)을 위시해 도시.역사와 경제.교육에 이르는 거의 전부다.

"많든 적든 가치의 일정부분은 노동으로부터 발생한다"는 대목만 해도 그렇다. 그건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던 노동가치설의 핵심이 아니던가.

"서구의 근대 학문이 하나씩 발견해 나간 중요한 개념과 이론들이 이미 수백년 전 이슬람권 학자에 의해 이렇게 체계적으로 논의되고 있음에 많은 학자들이 경악과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5백64쪽)는게 옮긴 이의 말이다.

이븐 할둔은 누구인가. 튀니지 태생의 그는 젊은 시절 중세 아랍의 지적 전통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 때 관직에 나갔던 그는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돌며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궁정 집사(執事)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이 과정에서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현실정치의 쓴맛을 맛보며 실각과 재기를 여러차례 거듭했다.

공직생활을 한 지 27년이 되던 45세에 그는 돌연 은둔에 들어간다.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역사는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 신의 거대한 계획은 무엇이고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성찰하기로 한 것이다.

'성찰의 책. 페르시아와 베르베르인 및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하는 탁월한 군주에 관한 초기 및 후대 역사의 집성'이란 긴 제목의 명저는 이때 탄생한다. 모두 3부로 이뤄진 책 중 제1부에 해당하는 것이 이번 번역본 '역사서설'이다.

아쉽게도 이번 책은 축약본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 축약본의 텍스트가 정평 높은 역사학자 다우드의 것이라서 일반독자들로서는 읽기 편한 측면이 있다. 일본의 경우 완역본은 1987년에 선보였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 독서계에 주는 의미는 많다. 시각과 정보면에서 서구 편향에서 벗어나 세계사를 폭넓게 바라보게 한다.

서구 중심주의의 근대 역사학 이전에 이런 역사철학을 쌓아올렸던 이슬람 문명의 숨은 힘도 느껴볼 수 있다. 다음은 그점을 강조한 김호동 교수의 전언이다.

"사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부족지1'과 '이븐 바투타 여행기', 이븐 할둔의 이 책은 그 이전 13세기 팍스 몽골리카를 통해 동서교류를 가능케 했고 세계사의 무대를 한껏 넓혔던 몽골제국이란 뒷배경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몽골과 그 직후인 근대 이전의 문화적 유산은 이제 다양한 종족과 문명을 포용한 탄력성으로 재평가된다. 지금이 그걸 평가해볼 시점이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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