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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도화선은 김춘추 맏딸 고타소의 죽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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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호 26면

신라 태종무열대왕 김춘추가 삼국통일에 관한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그림. 사서에는 딸 고타소의 죽음이 그를 통일로 몰아가는 동인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사진 민족기록화]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일까? 필자는 한국·한국인을 만든 삼한통합(소위 삼국통일)을 꼽는다. 신라의 삼한통합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던 한국사를 하나의 방향으로 결정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리즈를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시작하는 이유다. 삼한통합은 생각지도 않은 사건에서 시작됐다. 서기 642년 8월 김춘추(金春秋)의 딸 김 고타소(古陀炤)의 죽음이 그것이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제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Ferdinand) 대공 부처의 피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불꽃이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다시 쓰는 고대사 ① 신라 태종무열대왕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삼국사기』 47, 『죽죽(竹竹)』전이 그 장면을 보여준다.

“선덕여왕(善德女王) 11년, 임인(642년)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했다. 이에 앞서 도독 품석(대야성 성주, 춘추의 사위)이 막객(幕客)인 금일의 아내가 얼굴이 아름다움을 보고 이를 빼앗으므로 금일이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제와 내응하여 창고를 불태웠다. 그로 인해 성을 굳게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위기에 처하자 품석의 보좌관인 서천이 성 위에 올라가 ‘성민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고 했다. 윤충은 ‘그대들과 잘 지내지 않는다면 밝은 해가 내려다볼 것’이라 했다. 그때 품석을 보좌하던 또 다른 관리인 죽죽(竹竹)이 ‘백제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는데, 윤충의 말이 달콤하니 반드시 속이려는 것이기에 용감하게 싸워 죽는 것만 같지 않다’고 했다.

품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사졸들이 먼저 나가니, 백제에서는 복병을 내어 모조리 죽여버렸다. 품석은 나가려 하다가 장수와 병사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때 품석이 죽인 자기 아내가 춘추의 딸 고타소다. 『삼국사기』 41, 『김유신』전에 “백제가 대량주를 깨뜨리니 춘추공의 딸인 고타소 아가씨가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원통히 여겼다”고 나온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장녀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전해 들은 김춘추는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에 잠겼을 것이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1년(642) 조의 기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고타소의 죽음을 들은 춘추는 기둥에 기대 서서 종일토록 눈도 깜짝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앞을 지나쳐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얼마 후 말했다. ‘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그는 곧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신은 원컨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해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를 갈며 백제를 멸망시키기로 다짐한 춘추는 그해 겨울 신라를 끈질기게 침범해 들어오던 백제에 이은 또 다른 적국 고구려에까지 손을 내밀었다. 길을 떠나기 전 춘추가 유신에게 말했다.

“‘나와 공은 일심동체로서 나라의 기둥이오.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소?’ 유신이 대답하였다. ‘공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왕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 이렇게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소?’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이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그들은 작별하였다.”(『삼국사기』 41, 『김유신』)

고구려에 간 김춘추는 보장왕(寶藏王)을 만났다. 그는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내세운 왕이다. 김춘추는 연개소문도 만났다. 그런데 복수심에만 불타 있던 김춘추는 준비도 없이 ‘덜컥’ 청병을 했지만 고구려 왕은 과거 장수왕이 정복했던 마목현과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였다. 결국 거짓으로 “신라에 돌아가 왕에게 청해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것으로 춘추의 청병외교는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어떤 이가 고구려 왕에게 “춘추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 죽여서 뒷날의 걱정을 없애라”고 했다. 춘추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유신은 약속을 지켰다. 『삼국사기』 41, 『김유신』전에 따르면 60일이 지나도 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용사 3000명을 뽑아 고구려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기세가 무서웠다. 첩자가 이 사실을 알리자 고구려 왕은 춘추가 이미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유신의 각오가 대단하니 춘추를 더 잡아둘 수 없다고 생각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비롯된 딸의 죽음에 대한 춘추의 사적(私的) 복수심은 이렇게 백제·신라·고구려를 사생결단의 공적(公的) 관계로 몰아간 것이다. 18년 뒤 신라는 백제를 정복했고, 26년 뒤 고구려를 정복했다. 신라인들은 숙망(宿望)인 삼한통합(소위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었고 춘추 일가는 원한을 갚았다.

양신(良臣) 거느린 김춘추, 충신 만든 의자왕
삼국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나 백제보다 군사력이 강한 것도 아니었고, 토지나 백성이 많은 것도 아니었던 신라가 삼한통합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군주다운 군주, 신하다운 신하를 가졌는가에 그 답이 있다.

2008년 춘분 때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 [사진 이종욱 교수]

성군(聖君)에게는 충신(忠臣)이, 폭군(暴君) 밑에는 간신(奸臣)이 있게 마련이다.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직언보다 세 치 혀를 이용해 나라를 어지럽히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면 군주다운 군주와 신하다운 신하란 어떤 것일까?

한국인에게 고구려를 침략했다 안시성 싸움에서 한쪽 눈을 잃은 황제로 알려진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중국 역사상 선정(善政)과 태평성대를 이룬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된다. 당 태종과 그의 신하 위징(魏徵)은 충신과 양신을 구분하는 말을 남겼다.

위징이 제(帝·당 태종)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신을 양신(良臣)이 되게 해주시고 충신(忠臣)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제가 물었다. “충(忠)과 양(良)은 무엇이 다른가?”

위징이 말하기를 “… 양신은 (신하인) 자신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 군주는 성군의 칭호를 갖도록 하고 자손에게는 대를 이어 복을 받고 관직을 갖게 하고, 충신은 (신하인) 자신은 주살되고 군주는 대악에 빠지고, 집안과 국가는 모두 사라져 이름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 차이가 아주 큽니다” 했다.(『구당서(舊唐書)』 권71, 『위징열전(魏徵列傳)』)

한국사에도 양신과 충신은 많다. 그 예를 보겠다. 특히 신라 태종무열대왕(춘추)은 양신을, 백제 의자왕은 충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태종은 양신을 거느렸던 대표적 군주다. 그는 칠성우(七星友)라는 양신을 거느렸다. 『화랑세기』에는 612년부터 유신이 춘추를 “삼한의 주인(三韓之主)입니다”라며 받든 것으로 나온다. 그 이후 유신에 의해 결성된 칠성우는 춘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한 결사체였다.

그 장기 프로젝트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비담의 난을 진압한 것이 그 한 예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6년(647) 조와 진덕여왕 원년(647) 조를 보자.

646년 11월 상대등(上大等, 지금의 국무총리)에 임명된 비담은 647년 1월 초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女主不能善理)’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월 17일 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들이 비담 등 30명을 죽여 비담의 반란은 끝이 났다. 이 난을 계기로 칠성우들이 신라의 왕정을 장악했다. 그 와중인 647년 1월 8일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2월 칠성우 중 나이가 많았던 알천(閼川)은 상대등이, 춘추는 진덕여왕의 뒤를 이을 동궁(東宮)이 됐다. 『삼국사기』 41, 『김유신』전에는 “유신이 재상인 알천과 의논해 이찬 춘추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나온다. 태종대왕은 칠성우를 양신으로 만들었다.

『삼국유사』 『김유신』전에 “유신은 칠요(七曜, 즉 태양·달·수성·화성·목성·금성·토성)의 정기를 타고난 까닭에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고 신이함이 많았다. 칠성우에는 알천공·임종공·술종공·호림공·염장공·보종공·유신공이 속했다. 알천공은 나이가 많고 완력이 대단해 윗자리에 앉았으나 모든 공들이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했다”고 한다.

칠성우는 군사(알천공·임종공)·행정(술종공)·재정(염장공)·불교(호림공)·선도(仙道·보종공) 등에 전문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칠성우는 아들 대에 이르기까지 능력을 달리하며 춘추를 모신 삼한통합의 주역들이다. 칠성우들은 높은 관직에 올랐고 태종은 성군의 칭호를 가지게 되었으며, 자손들은 대를 이어 복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인의 다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들로 자처하는 것은 삼한통합으로 이룬 신라 중흥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태종무열대왕릉에서는 김씨 후손들의 제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백제의 충신은 누가 있을까. 의자왕, 그는 충신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충신이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으니 그 어찌 역설의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다음 호에서 살펴본다.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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