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 칼럼] 일본 쇄국주의를 벌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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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호 30면

한국이 걱정해야 할 일본의 고질병이 도지고 있다. 국제화의 결여, 일종의 쇄국주의다.

일본인의 해외 근무 기피는 유명하다. 깨끗하고 안전하며 모든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 일본을 놔두고 외국에서 무슨 고생을 하느냐는 풍조다. 어떤 모임에선 “일본에선 외교관마저 해외 근무를 기피할 것”이란 농담까지 나왔다. 얼마 후 우스개랍시고 이 이야기를 한 일본 전문가에게 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농담이 아닌 사실”이라는 거다. 그는 “잘나갈수록 외무성 본부에서 일하려 한다”면서 “현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郎) 주미 대사가 대표적인 예”라고 일러준다.

1974년 도쿄대 법대 졸업 직후 외무성에 들어간 그는 경력 40년의 베테랑 외교관이다. 그럼에도 해외 경력이 일천하다. 특히 97년 외무성 북동아시아 과장 이후 2012년 미국대사로 발령나기까지 15년간은 쭉 일본에서 일했다. 그러니 해외 물정에 밝고 외국어에 능통할 리 없다. “주미 대사라면서 영어가 영 시원치 않다”고 일본 언론이 꼬집을 정도다.

해외 기피는 회사원, 공무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유학생도 확 줄었다. 얼마나 심각하면 미 하버드대 드루 파우스트 총장이 나서서 경고할 정도다.

3년 전 그는 방일에 앞서 “하버드 학부생 중 일본인 유학생은 단 5명”이라며 “중국, 한국에 비해 일본 유학생들의 존재감이 희미하다”고 토로했다. 2000년도 하버드대 학부·대학원에서 공부했던 일본 유학생은 151명이었다. 그랬던 게 10년 뒤 50명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 중국 유학생은 227명에서 463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한국 유학생도 183명에서 314명으로 증가했다.

일본이 늘 그랬던 건 아니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때는 외국과의 교류가 어느 나라보다 활발했다. 서양 문물을 흡수하기 위해 국비유학생을 내보냈다. 1868년부터 44년간 지속된 메이지 시대 때의 해외 유학생은 2만4700여 명. 빈약했던 국력과 뒤떨어진 교통수단 등을 고려해 볼 때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첫 국비유학생 중엔 1875년 하버드대 법대에 입학해 공부한 이도 있었다. 한일병합의 주역으로 꼽히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외상이다.

밖으로만 나간 게 아니었다. 외국인들도 대거 불러들였다. 1868년부터 1900년까지 일본 정부에 의해 스카우트돼 이 나라에 온 영국인만 4300여 명. 이 밖에 프랑스인 1500여 명, 독일인·미국인 각각 1200여 명씩이 서양의 문물을 일본에 전해줬다.

이렇게 개방적이던 일본인들이 어느 틈에 밖으로 난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곤 주변 국가의 감정은 무시한 채 미국 눈치만 본다. 조선 말엽, 오로지 청나라에만 매달리던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연상케 한다.

지금까진 한·일 간 외교분쟁이 경제에까진 영향을 주지 않는 ‘아시안 패러독스(Asian Paradox)’가 작동하는 듯했다. 그래서 한·일 간 정치 지도자들이 부담 없이 상호 비방에 나서고 있다는 게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분석이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2012년 일본의 대한 투자액은 45억4000만 달러. 그랬던 게 지난해는 10월까지 19억6000만 달러로 격감했다. 무역도 줄었다. 지난해 양국 간 무역액은 전년 대비 10.4% 줄어든 920억 달러로 집계됐다.

청나라 관리 황쭌셴(黃遵憲)이 조선의 쇄국정책을 걱정하며 쓴 『조선책략』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구 위에는 대·소국을 막론하고 천을 헤아리는 많은 나라가 있되 능히 관문을 닫고 외국인을 거절할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고. 밖으로의 문을 걸어 잠그려는 정서는 이웃은 물론 자신에게도 득 될 게 없다는 걸 일본인들은 빨리 깨달아야 한다. ‘갈라파고스 병’을 앓고 있는 이웃나라를 위해 한국인이 『일본책략』이라도 써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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