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unday]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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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호 31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통치불능(ungovernability)’의 상태에 빠졌다는 지적(본지 지난해 12월 29일자 1, 4, 5면)은 산적한 현안을 마주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적으로는 성장이 고용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제구조에 양극화와 청년실업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도 당면과제다. 그뿐인가. 국제적으로도 엔저의 공습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등 글로벌 경제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일본에 북한까지 맞물린 동북아시아의 첨예한 갈등도 풀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여의도 국회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싸움에만 몰두해 있고, 청와대는 불통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국이다. 그러니 통치불능의 시대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한국의 사회갈등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7개국 중 종교분쟁을 겪은 터키 다음으로 높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연간 최대 246조원에 달할 정도다.

세계정치학회장을 지낸 기예르모 오도넬은 민주주의를 도입한 국가들 사이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가리켜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라고 규정지었다. 이 체제 하에서 대통령은 선거에서의 승리로 통치의 모든 정당성을 위임받았다고 판단한 뒤 입법부나 사법부의 견제를 무시하고 자유롭게 통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볼프강 메르켈은 이를 ‘결손민주주의(Defective democracy)’라고 표현했는데, 한국의 민주주의도 이 범주에 포함돼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 다수결주의에 입각한 승자 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합의제 민주주의 형태의 분권형 리더십으로 개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선거에서 51대 49로 신승(辛勝)한 당선자가 권력을 100% 독점하는 ‘all or nothing’ 구조가 지속되는 한 대선 때마다 사생결단식 갈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학계의 거두 새뮤얼 헌팅턴은 “신생 민주주의는 두 번의 정권교체를 통해 공고화된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헌팅턴의 기준을 통과한 지 오래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는 갖췄을지 몰라도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루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이젠 민주주의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학계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통치불능의 덫에 걸려 꼼짝달싹못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조적으로 해방시켜 시민들에게 되돌려주는 일, 이것이야말로 1987년 이후 27년째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민주화의 진정한 과제다. 우리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그 ‘시즌2’인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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