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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간의 대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영국의 소설가요, 수필가인「올더스·헉슬리」는 1963년 죽기 바로 얼마 전에 문학과 예술은 현대과학과 기술로부터 가치 있는 영감을 조금도 받은 일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슬퍼하면서 이와 같은 결과의 원인은 다름 아닌 작가나 예술가가 현대과학 기술의 발달에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한탄하였다.
또 「H·G·웰즈」는 죽는 날까지<과학자> 즉라는 단어의 사용을 반대하고 <과학인> 즉라는 말이 적당한 표현이라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오늘날에 와서는 그리 심각한 문젯거리론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현대인들로서는 다시 한번 이와 같은 옛 일들을 곰곰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요사이 같이 혹서가 계속되면 우리들은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간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냉방장치가 보편화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지만 국민개인소득이 4천「달러」가 넘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냉방장치가 대중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에서 바다에서 「바캉스」를 즐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원한 자기 집에서 뛰쳐나와 산이나 바다에서 여름을 만끽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과거 10만년 이상의 진화 역사에서 오는 인간의 선천적인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즉 사람이란 역시 현대기술 문명만 가지고는 참으로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헉슬리」의 한탄은 물론 이와 같은 이유의 한 부분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웰즈」가 죽는 날까지 반대하였던 과학인 아닌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의 책임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까지의 과학자들은 약품이나 기계장치를 가지고 인간의 육체나 정신을 변경시키고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인간은 다만 하나의 생물학적 기계로서 그들의 연구대상이 되어온 사실에 그들은 만족 해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과학자 아닌 과학인 이 하나의 기술자적인 독특한 전문용어로써가 아니라 인간적인 언어로써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을 우리 인간 생활의 일상용어로서 친근감 있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과학과 인간의 대화는 이루어지며 인간의 참 행복을 위한 새로운 과학기술은 꽃이 피게 될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김용준(고대 이공대교수·이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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