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빼는데 웬 천식·간질 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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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약대를 졸업하고 경기도의 한 약국에서 일하고 있는 새내기 약사 李모씨는 요즘 고민에 빠졌다. 약국 인근에 있는 비만 클리닉에서 발행하는 처방전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건씩 처방전을 건네받지만 그때마다 양심과 현실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한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한 40대 주부가 가져온 처방전엔 식욕억제제와 신경안정제 등 11가지나 되는 약품이 적혀 있었다. 천식치료제와 간질치료제 등까지 들어 있었다. 지난달엔 한 아주머니가 "뚱뚱한 아들(9)이 운동은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 약을 먹인다"며 비슷한 처방전을 들고 왔다고 한다.

"대학 때 배운대로라면 이런 처방전에 따라 절대 조제해 주면 안돼요. 환자들도 부작용이 있는 줄 알면 억만금을 준대도 먹지 않을 겁니다. 젊은 여성들이 비만 처방전을 많이 받아 오는데, 일부 약품은 불임이나 기형아 출산의 위험까지 있거든요."

李씨는 "약은 보통 다섯 가지 이상 섞지 않는 게 기본인데, 이처럼 10여 가지를 동시에 처방하면 체내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처음엔 너무 황당해 주인 약사에게 '이걸 어떻게 조제하느냐'고 따졌지만 '처방전대로만 하면 된다'는 핀잔만 들었습니다."

비만 클리닉은 "용하다"는 소문이 퍼지길 바라면서 부작용이 있어도 조금이라도 약효가 있는 약물을 처방하고, 약국은 병원과의 공생관계 때문에 그대로 조제해 준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 약사로 발을 내디뎠을 땐 자부심이 컸는데 막상 엉터리 처방을 보고도 그냥 따를 수밖에 없는 의료 현실을 접하면서 직업에 대한 회의가 든다"면서 "다른 약국에서 근무하는 약대 동기들도 말도 안되는 비만 처방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아우성"이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의료 현장에선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과잉 처방이 성행하고 있다. 시민단체인 건강연대가 지난해 말 비만클리닉 19곳을 모니터링한 결과 다섯곳에서 비만치료제로 공인받지 않은 천식 치료제 아미노필린 등을 쓰고 있었다.

대한비만학회 회장인 경희대 의대 김영설 교수는 "단기간에 살을 빼고자 하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일부 비만 클리닉에서 부적절한 처방을 하는 것 같다"며 "다수의 양심적인 의사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처방은 근절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한의사협회와 비만학회는 적절한 비만 처방 기준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이달 중 발표키로 했다.

윤혜신 기자

◆ 알림=약사 李모씨가 최근 중앙일보 취재팀에 "왜곡된 의료 현장이 바로잡히도록 기사를 써달라"는 e-메일을 중앙일보에 보내와 이를 계기로 심층취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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