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전거 끌고 건너야 할 횡단보도에 웬 발디딤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인천 연수사거리에 설치된 자전거 발디딤대(왼쪽). 시민들이 자전거를 탄 채로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도록 돕고 있으나 이는 위법 시설물이다. 오른쪽은 자전거 캐리어가 장착된 오준교씨의 승용차 모습. 캐리어에 가려 자동차 번호판이 보이지 않지만 추가로 부착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서울 노량진에 사는 회사원 오준교(43)씨는 지난달 15일 20만원대 자전거 캐리어를 구매했다. 10살배기 아들과 함께 교외로 나가 자전거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자전거 캐리어는 자동차 뒤쪽에 부착한다. 그런데 지난 6월 자동차관리법이 개정되면서 ‘자전거 캐리어가 자동차 번호판을 가릴 경우 별도의 차량 번호판을 부착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 이에 따라 오씨는 번호판을 발급받기 위해 연차를 내고 같은 달 20일 서울 동작구청 교통행정과를 찾았다. 구청 직원은 자동차 상태를 확인하더니 발급을 해 줬다. 하지만 “어떻게 달아야 할지는 모르니 번호판 제작소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 서울에는 두 곳의 번호판 제작소가 있다. 오씨는 강서구 마곡동의 H실업을 찾았으나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직원이 “해당 제품에는 번호판을 부착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거치대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구청 측에 다시 문의하자 이번에는 “캐리어 수입·판매업체에 문의해 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수입업체 측은 “해외에서 수입하는 제품이라서 캐리어를 개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오씨는 정부가 운영하는 인터넷 국민신문고에 고충을 올렸지만 해결책은 듣지 못했다. 결국 그는 구청에서 발급받은 번호판을 차 트렁크에 넣고 다니기로 했다. 오씨는 “최대 300만원의 과태료를 피하려면 달리 방도가 없다”며 “정부가 각종 자전거 장려 정책을 홍보하지만 자동차에 자전거를 싣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어서야 누가 자전거를 타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자전거 정책과 법률조항이 충돌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지하철 내 자전거 휴대 규정도 이용자 편의와는 거리가 멀다. 현재 지하철 중앙선은 전일, 대부분의 수도권 지하철은 주말에 한해 자전거 휴대승차가 허용된다. 하지만 자전거의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이용은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서울시는 자전거 경사로를 확충할 계획을 밝혔으나 지하철 1~8호선 388개 역 중 경사로가 설치된 역은 33곳에 지나지 않는다.

 아예 행정과 법이 반대로 간 경우도 있다. 인천시 연수구는 2011년 자전거 발디딤대 12개를 설치한 이후 올해 14개를 추가로 설치했다. 자전거 발디딤대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바뀔 동안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고 발을 걸친 채 기다릴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연수구 측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도로교통법 13조는 ‘자전거 운전자가 횡단보도를 이용할 때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보행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안전행정부 담당자도 “코펜하겐은 운행 중 긴급상황 발생 시 안전을 위해 횡단보도 앞이 아닌 차도 쪽에 설치했다”며 “연수구 발디딤대는 자전거를 탄 채로 횡단보도를 이용할 수 있게 장려하는 것이라서 해당 구청에 시정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앙대 김중권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전거 이용 활성화라는 한 가지 목표만 갖고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행정과 법률의 충돌이 발생한 것”이라며 “자전거 이용자뿐만 아니라 보행자, 운전자 등 다양한 주체를 고려한 행정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사진=구혜진 기자
제보는 e메일 soci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