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코 냉혹하지 않다|인도 수상 「간디」 여사 불 여기자와 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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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억 인구의 인도를 이끌고 있는 「인디라·간디」 수상을 한마디로 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간디」 수상은 도전적이고 몰인정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가 하면 때로는 용감하고 강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안정보다는 혼란, 부보다는 빈곤의 나라 인도를 다스리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지성을 갖추고 있는 여 수상이다. 다음은 「헨리·키신저」, 「티우」 등과 단독 「인터뷰」를 가진 것으로 이름 있는 「이탈리아」의 여기자 「오리아나·팰러시」가 최근 취재한 「인디라·간디」 수상과의 「인터뷰」 내용을 추려 본 것이다.
균형 잡힌 마른 몸매에 흰머리가 섞인 검은 곱슬머리, 커다란 눈을 한 「인디라·간디」여사.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대영제국에 대항, 독립 운동을 벌인 인도의 두 전설적인 인물 「자와할랄·네루」의 딸로, 「마하트마·간디」의 제자로 성장했다. 어떤 질문에나 간결 명료하게 응답하는 그는 앞의 두사람 외에 변호사였던 할아버지, 「유엔」에서 여성으로 처음 의장이 되었던 아주머니 「판디트」의 영향 밑에 자라나 42년2월 「봄베이」 출신의 변호사 「페로제·간디」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아, 결혼 13개월 후 부부가 함께 투옥되는 불행을 겪고 47년 「네루」가 수상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남편보다는 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는 59년 국민회의당 의장이 되었고 60년에는 심장마비로 남편이 사망했으며 66년 수상이 되어 70년 재선출되었다.
-「간디」 여사는 냉혹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무슨 일이든 직접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인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느라 반나절은 허비한다. 그러나 이제 인도의 국민들은 먼저 일을 하고 그 다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어야한다. 그래서 나는 늘 국민들에게 서둘러 일할 것을 말하게 되는데 이것을 보고 냉혹하다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발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보통 인도 사람과 같으며 거만하지 않다.』
-그러나 당신은 거만한 사람이라 생각된다. 한 예로서 지난 16년 인도의 기근 때 각국에서 돕겠다고 나섰지만 거절하지 않았던가?
『그 결정을 한것은 나 개인이 아니다. 우리는 구걸하는 국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각국이 인도를 해치려 하지는 않았다.
『인도가 도움을 거절하여 오히려 따른 나라들을 해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인도는 늘 잘못 평가되어 왔다.
폭력을 쓰지 않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벌였을 때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당신들은 말했지만 우리는 싸워서 이겼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채택하고자 했을 때, 또 정치는 민주주의로, 경제는 사회주의로 둘을 공존시키려 했을 때 『문맹인의 나라에서 어떻게』하고 당신들은 말했지만 이 모두가 성공했고 이제 인도에는 더 이상 기아 문제는 없어질 것이다.
-여성 해방 운동을 어떻게 보는가?
『소수인들이 모여 원하는 바를 주장하는 혁명의 하나라고 본다. 흑인 「인디언」·여성운동이 모두 비슷한 운동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보다 일하기 쉽지 않은가?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여자라거나 남자로 대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은 특별한 아버지 밑에서 특별한 교육을 받아 어린 시절 나무에 거침없이 올라가는 소년처럼 또 인형을 아끼는 소녀로 자랐다.』
-「파키스탄」에 승리함으로써 적어도 앞으로 20년간은 당신이 수상 자리를 지키리라고 사람들은 예상하는데….
『그 기간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 스스로 중책을 맡을 수 없다고 판단되면 그만들 결심이다.
은퇴 후에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던 역사나 인류학 공부를 다시 하거나 손자들을 돌볼 예정이다.』 <미 「메콜즈」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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