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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최고의 순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던 그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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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계사년(癸巳年) 뱀띠해가 저물어갑니다. 되돌아보면 좋은 때도,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죠. 소중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될 2013년을 돌아보며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을 뽑았습니다. 신문과 방송이 국내외 10대 뉴스를 뽑아 한 해를 되돌아봅니다만 소중은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을 선택했습니다. 최고의 순간은 국외에, 최악의 순간은 국내에 몰린 게 아쉽습니다만 2014년은 달라지게 되길 기대합니다.

AP=뉴시스

①교황 할아버지는 내 친구

10월 26일 저녁 7시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 15만 명의 인파가 운집해 교황 프란치스코(77)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가정의 중요성에 대한 강론이었다. 갑자기 단상에 여섯 살가량 된 빡빡머리 꼬마가 올라왔다. 꼬마는 물끄러미 교황을 쳐다보기도 하고, 단상 위에서 춤을 추거나 말씀을 하는 교황의 다리를 껴안기도 했다. 심지어 교황의 의자에 앉기도 했다. 교황은 그냥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제지하지 않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올 3월 266대 교황에 오른 프란치스코 교황의 푸근하고 소박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으로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 글리오. 로마 가톨릭 역사상 유럽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 출신 첫 번째 교황이다. 권위와 엄숙함을 던져버리고 빈자와 약자에게 다가간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을 감동케 했다. 예수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태복음 19장 14절)고 하신 말씀대로였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②“10, 9, …, 2, 1, 0, 발사.”

1월 30일 오후 4시 전남 고흥군 나로우주센터. 한국 최초 우주발사체 나로호의 1단 엔진이 점화됐다. 이어 굉음을 내며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지상을 떠나 215초 경과. 상단(2단)에 실려 있는 페어링(덮개)이 두 개로 쪼개졌다. 우주센터에선 “페어링이 성공적으로 분리됐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1단 로켓이 분리되는 순간이었다. 2009년 8월 1차 발사에선 로켓 분리가 안 돼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무사히 성공한 것이었다. 발사 395초. 2단 엔진이 점화됐다. 나로과학위성을 목표 궤도(지상 297.64㎞)에 올리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540초(9분) 후 상단에서 위성이 분리됐다. 지난 10여 년 동안 거듭된 실패와 좌절을 이겨낸 순간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우주강국을 뜻하는 ‘스페이스클럽’에 11번째로 가입했다. 나로호 발사 이후 정부는 우주개발을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러시아 기술로 만들어진 1단 로켓 기술을 한국 기술로 대체해 2020년 6월 한국형 발사체를 쏘아올리기로 했다.

AP=뉴시스

③샌프란시스코시, 소년을 위해 기꺼이 고담(Gotham)시가 되다

11월 15일 오전 11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그레그 수어 경찰서장은 지역 방송인 ABC7에 출연해 “지금 와서 우리를 구해 줘요”라고 호소했다. 강력 범죄에 빠진 시를 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배트키드(Batkid·어린 배트맨) 마일스 스콧(5)이 ‘배트모빌’이라는 차를 타고 출동해 악당을 체포하고, 폭탄에 묶여 있던 여성을 구출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고마워요, 배트키드!”라고 화답했다. 이날 하루 시장과 경찰서장은 물론 공무원, 시민 1만3000여 명이 참여해 샌프란시스코시를 배트맨 시리즈의 배경이 된 고담시로 바꿨다. “배트맨이 되고 싶다”는 마일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마일스는 생후 18개월 때 백혈병 진단을 받은 어린이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비영리재단 ‘메어크 어 위시(Make a Wish)’는 그의 꿈을 샌프란시스코시에 알렸고, 온 시민이 이를 이뤄주려 나선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마일스군! 앞으로도 고담시를 부탁합니다”라는 내용의 동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AP=뉴시스

④말랄라 유사프자이 “펜과 책은 테러리즘을 물리칠 무기”

9월 2일 오전 11시 영국 버밍엄시 브로드 스트리트에 있는 버밍엄 도서관에서 열린 개관식의 한 장면이다. 말랄라 유사프자이(16)가 이곳에서 개관식 연설을 했다. 그는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파키스탄 소녀다. 탈레반이 여자아이의 학교 등교를 금지하고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빼앗자 그는 이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을 벌였다. 2012년 머리에 총상을 입어 영국으로 긴급히 후송됐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이 일로 유명해졌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수천 권의 책을 읽고 지식으로 힘을 키우겠다. 펜과 책은 테러리즘을 물리칠 무기”라고 말했다. 버밍엄 도서관은 유럽 최대 규모의 공공도서관. 1만 명을 수용하며,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 초판본을 비롯해 10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말랄라는 올해 노벨평화상 발표에서 유엔 산하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 밀려 노벨상을 받지 못했으나 오히려 상을 받지 못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더 받았다. 영국 신문 파이낸셜타임스는 그를 올해의 여성에 선정했다.

AP=뉴시스

⑤“President, I’m Castro(오바마 대통령, 난 카스트로요).”

12월 10일 오전 11시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FNB축구 경기장.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추모식이 열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행사장에 도착해 각국 정상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공교롭게도 첫 번째가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다. 카스트로는 1959년 공산혁명 정권을 세운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이다. 카스트로는 오바마와 악수를 나누며 영어로 “난 카스트로”라고 말했다. 외신은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적과의 화해”라는 보도도 나왔다. 미국은 공산혁명 이후 쿠바와 52년째 국교를 끊은 채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악수는 미국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로스 레티넌 공화당 하원의원은 “(오바마가) 피 묻은 손을 잡았다”고 비판했다. 백악관 측은 “우연한 만남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만델라는 생전엔 흑인을 탄압했던 백인 정권을 용서하고 흑백 간 갈등을 끝내는 데 기여했으며, 사망 후에도 적대국 원수가 손을 잡게 했다.

뉴시스

⑥침묵의 암살자 “제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싶다”

6월 30일 오후 5시 미국 뉴욕주 사우샘프턴 서보낵 골프장 18번 홀. 박인비(25·KB금융그룹)은 두 번째 퍼팅을 준비했다. 홀과 공의 거리는 20여㎝. 그는 쉽게 공을 홀 안에 넣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최종 8언더파 206타. 이날 이 퍼팅으로 4월 나비스코 챔피언십, 5월 웨그먼스 LPGA 챔피언십에 이어 3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1950년 미국 베이브 자하리아스가 세운 3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을 새로 쓴 셈이었다. 그는 “기록을 깬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하고 제 샷과 골프에 집중하려 했다”며 “세 번 우승한 거에 제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경기 도중 자신의 감정을 도무지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침묵의 암살자(silent assassin)’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빼어난 퍼팅 실력,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박인비는 올해 총 6승을 거뒀으며, 올해의 선수상·상금왕(245만6619달러·약 26억여원)을 차지했다.

뉴시스

⑦사고 항공기 승객 “그녀는 영웅이었다.”

7월 6일 오전 11시27분. 인천공항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향하던 아시아나항공기 214편이 착륙 중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뒷부분을 공항 제방에 들이받았다. 이후 비행기 꼬리가 떨어져 나가며 화재가 발생했다. 승객 291명, 조종사 4명, 객실 승무원 12명이 타고 있었다. 힙합 공연 프로듀서로 일하는 앤서니 나씨를 비롯해 탑승객들은 비행기 안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이때 여자 승무원들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착석하세요. 순서대로 대피하겠습니다. 가방을 버리고 나갑니다.” 캐빈매니저 이윤혜(40) 사무장은 부상을 당한 승객들을 직접 업고 탈출을 도왔다. 나씨는 “몸집도 작은 여승무원이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승객들을 등에 업고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너무나 침착했다. 영웅이었다”고 말했다. 승무원들은 맨 마지막으로 대피했다. 사망자는 3명. 승무원들의 빠른 판단과 대응 덕분에 피해 규모는 최소화될 수 있었다.

뉴시스

⑧“Ryu can do!(류현진은 할 수 있다!)”

5월 28일 오후 8시11분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홈구장인 다저스타디엄에서 투수 류현진은 LA 에인절스 2번 타자 중견수 트라웃을 상대로 113구째 공을 던졌다. 공은 패스트볼로 속도는 시속 151㎞. 1회부터 9회 초까지 한 점도 허용하지 않고 내리 던진 공인데도 위력은 여전했다. 트라웃이 친 공은 2루수 앞 땅볼. 2시간11분 동안 펼쳐진 경기는 LA의 승리로 끝났다. 올해 처음 한국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류현진이 데뷰한 지 불과 11번째 경기 만에 완봉승을 따내는 장면이었다. 류현진인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빨리 완봉승을 거뒀다. 그보다 앞서 진출한 박찬호는 데뷰한 지 6년, 김선우는 4년이 걸렸다. 류현진은 완봉을 하자마자 포수 엘리스와 포옹했고, “꿈만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다. 정규시즌에서 14승8패, 192이닝, 평균자책점 3.0을 기록했으며 포스트 시즌인 내셔널리그 챔피언 결정전까지 진출해 세인트루이스를 상대로 1승을 따내기도 했다. 포스트 시즌 승리투수는 한국인 최초다.

⑨과자 사는 경찰관

8월13일 오후 7시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서울시립대 앞 네거리 길가. 여기를 지나던 시립대 세무학과 3학년 권태훈군은 경찰관들이 길가에서 뻥튀기 과자를 파는 노점상 할머니를 쫓아내려는 줄 알고 스마트폰을 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경찰관들은 할머니가 파는 과자를 전부 다 산 다음 “날씨가 너무 더우니 어서 집으로 가세요. 여기 나오시면 쓰러지세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권군은 이 장면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장면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화제가 돼 한꺼번에 15만 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좋아요’를 눌렀다. 사진 속 주인공은 서울 동대문경찰서 관할 청량리역 파출소 최용준(36) 경장과 임중섭(26) 순경. 할머니는 과자 일곱 봉지를 3500원에 팔았다고 한다. 임 순경은 “할머니가 무더위에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과자를 파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며 “어차피 저희도 간식 사먹은 건데 이렇게 화제가 되니 부끄럽다”고 말했다.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경찰관들의 온정이 유난히 빛났다.

AP=뉴시스

⑩“꿈을 이루는 데 나이는 없다.”

9월 2일 오후 2시 미국 동남부 맨 끝 플로리다주 키웨스트 해안에선 파란색 수영모자를 쓴 여성이 수영을 마치고 뭍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처음엔 다소 비틀거렸으나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환호에 힘을 얻은 듯 한발 한발 힘있게 내디뎠다. 그의 이름은 다이애나 니아드. 환갑이 넘은 64세였다. 그는 53시간 전인 8월 31일 쿠바의 아바나 인근 헤밍웨이 마리나 앞 바닷가에 뛰어들어 177㎞를 수영해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키웨스트와 쿠바 사이 바다를 플로리다 해협이라고 부른다. 여기엔 목숨을 위협하는 상어도 우글댄다. 그 전에도 이 해협을 수영해 건넌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니아드처럼 아무런 상어 보호장비나 철망을 갖추지 않은 채 맨몸으로 바다를 수영해 건넌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미 1978년, 2002년, 2012년에도 총 네 차례 도전했으나 해파리 떼나 거센 파도 등을 만나 중도 포기했었다. 니아드는 바다를 건넌 뒤 취재진들에게 “포기하지 말라. 꿈을 이루는 데 나이는 없다”고 말했다.

강홍준 편집장·황유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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