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4)<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선전과 선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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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47년5월21일에 재개되어 10월18일 제62차 본회의까지 진행된 미·소 공위에 대해 북한은 『공위의 사업은 미국의 팽창정책과 남한 반동파들의 매국적 파괴음모로 완전히 파탄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이 제2차 공위에 어떠한 실리를 노리고 참석했나 하는 그 진의를 드러내 놓았다. 즉 북한은 남한의 좌익세력을 고무·선동하여 사기를 높임으로써 남한에 혁명기지의 터전을 닦으려 했는데 공위의 실패로 이 역시 좌절됐다고 분석했다.
당초부터 박헌영의 남로당은 소위 『3상회의 결정 총체적 지지』라는 알쏭달쏭한 선전 구호를 내 걸고 공위와의 협의대상에서 반탁 진영을 배제하기에 전력을 기울여 오다가, 공위가 재개되자 이를 『남로당의 승리』「이번 공위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등의 아전인수격인 선전을 해 왔었다.
앞서도 말했듯 이때 당이 대중을 현혹, 또는 유도하면서 각급 하부기관에 지명한 것이 당원 1백만 돌파를 위한 이른바 당원 5배가 운동이다.
이러한 당원 증가운동은 말할 것도 없이 공위의 진전에 대비한 당세의 강함과 「인민의 지지」를 과시함으로써 무익보다 우위의 취급을 받으려는 계산에서였다.
남로당의 이같은 조직확대공작과 병행된 필사적인 선전선동, 우익진영에 대한 고립화 공작에도 불구하고 공위는 협의 대상문제를 둘러싸고 교착 상태에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남로당은 때를 놓칠세라 7월27일 민전 명의로 전국 각지에서 소위 「공위 경축 및 임시정부수립촉진 인민대회」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열고 국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날 서울에서는 공산당이 대중 모임을 가질 때면 항상 그러하듯 남산공원 광장에서 공위의 양측 수석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대회를 열었었다. 내 기억으로 당은 이날 대회에 참석한 인원이 60여만명이라고 발표했었다. 솔직히 그것은 과장된 것이었지만, 7·27대회의 동원 수는 당시까지 공산당의 모임중 규모가 컸던 것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7·27대회는 남로당이 창당된 후 가장 조직적으로 군중 동원에 힘을 썼던 행사였기 때문이다.
7월 중순 당 수뇌부에서 7·27대회 개최가 결정되었을 때 「미국대표단이 공위사업을 파괴하기 위해 이른바 반탁분자를 격려, 회의를 지연시키고 파괴를 기도하고 있다』는 선전 지령문이 각급 당부에 전달되었다.
이 지령문에 따라서 하급당부에서는 당의 입장을 전개시키며 미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고 우익단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이른바 7·27대회 전략을 마련했다.
각급 당부의 조직부는 가두세포를 통해 시민들을 대회장으로 몰고 가고, 청년부는 재발로 걸을 수 있는 청소년이라면 모조리 끌고 오도록 지시를 받았다. 이들 각부는 독립국가 건설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절실한 염원과 심정을 교묘히 이용하여 허울좋은 선전으로 군중을 유도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또 부녀부는 여맹을 동원, 호기심 많은 부녀자들을 부채질하도록 했고, 선전부는 이번 대회의 의의를 「비라」나 벽보 등으로 작성했으며 각 세포에서는 「플랜카드」를 만들도록 했고 그날의 칠「슬로건」이 하달됐다. 구당 간부들에게는 관내 주요공장직공들의 동원책임이 주어졌다.
대회전날인 7월26일까지 서울시내의 동원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런데 서대문구 당 관내의 편창제사 공장에서 말썽이 있었다.
그 공장에는 7백명의 남녀직공들이 있고 이미 여러 세포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대회에 참가할 기미를 보이자 공장책임자가 며칠전부터 직공들의 외출을 금지시키는 등 의부와의 연락을 못하도록 했다.
서대문구 당의 노동부 책임자가 대회 전날까지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자 중앙당의 조직 ORG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중앙당의 동원책임자 역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공장부근에 얼씬 조차 할 수 없으니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그때 서대문구 당의 어느 여자당원이 묘안을 냈다. 즉 자신이 공장세포책임자의 친척으로 가장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밤9시쯤 시골여인을 가장한 여 당원이 공장여직공 기숙사문을 두드리고 세포 책임자와의 면회에 성공했다.
여 당원의 연기가 좋았던지 기숙사 책임자는 엄격히 금지된 면회를 자신의 입회 하에 약 5분간 허락했다.
『시골 아버님께서 돌아가셔 내일(27일) 아침10시에 장례를 치른다』는 말을 전한 것이 고작, 그러나 당으로서는 세포와의 접선에 성공한 것이었다.
27일 상오4시가 조금 넘으니 10여명씩 짝을 지어 여직공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6시 조금 넘어서는 거의 모두가 모였다.
그들은 여맹원들이 넘겨 수는 주먹밥을 받아먹고는 4열로 줄지어「플랜카드」를 들고 남산공원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날 동원된 여 직공 중 몇몇 당원을 제외한 대부분은 무슨 영문인 줄도 모르고, 단순한 호기심에서, 또는 외출을 금지시킨 공장 측에 대한 반발로 함께 몰려나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으로서는 숫자가 문제였기에 일단 성공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날 대회에는 민애청·여맹·전평·농조 등 민전의 산하단체인 당의 외곽단체가 모두 참석했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군중 사이사이에 끼여있는 당의 「아지프로」대원은 미리 주어진 「슬로건」을 외쳤다. 미국대표에게는 욕설이 섞인 것을, 소련 대표는 환영한다는 내용이…. 공위에 대해 조작된 「아지프로」를 하는 것이었다.
특히 영화무대예술인의 「아지프로」대원들은 군중심리를 잘 포착하고 효과적인 선동 연설을 했던 기억이 있다.
며칠 후 시당부에서는 7·27대회에 대한 문건을 하달했는데 이에 따르면 서울서 60만, 인천서 10만, 대구 7만, 부산 12만, 전주 9만, 마산 5만, 개성 2만명 등이 동원됐다고 했다.
마치 전국민이 당의 노선을 지지하는 듯한 기만선전을 했지만, 그 숫자가 실제와 얼마나 차이가 있었나를 공산당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계속>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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