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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06)|<제자 박갑동>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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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강국의 말로>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이 내리기 하루 전날 김수임으로부터 미리 귀띔을 받은 박헌영 자신은 그날로 영구차를 타고 평양으로 도망쳤으나 이강국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이강국은 철저하게 김수임을 이용했다. 즉 김수임은 당시 동거 중이던「패트」대령에게『지금 개성에 계시는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곧 의사를 데리고 가야할텐데 당신 자동차를 빌려주세요』라고 애원, 패트 대령의 전용승용차를 빌리는데 성공했다.
주한미군 헌병사령간의 전용차에 미군 운전사-비록 그 자동차 속에 흉악범이 타고 있었다 치더라도, 당시 그 차를 검문할 사람이 없었다.
그날 김수임이「패트」대령 차에 태워 한성으로 데리고 간 의사가 바로 이강국이었고, 조수로 가장한 사람이 이부 동생인 최만용이었다는 것이다.
이강국은 서울을 탈출한 뒤 47년2월에 북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에 초대 외무국장에 취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이 북한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도피자를 크게 소홀히 다루지는 않았다.
그런데 인민위 회의 때 김일성과 이강국이 한자리에 앉으면 풍채나 이론이나 언변 등 모든 점에 있어서 이강국이 크게 두드러져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고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김일성이『이강국하고는 한 자리에 못 앉겠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무국장 자리를 쫓겨났다.
그때 김일성은 이강국이 종파분자요, 지방주의자라고 축출이유를 밝혔었는데 이것은 당시 분위기로 보아 다분히 감정적인 발언으로 풀이되었다.
그 이유는 이강국의 월북을 전후해서 서울에 있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평양에 가 있었는데, 오갈데 없는 그들이 찾아가는 곳은 이강국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강국은 사람이 좋아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라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소문이 났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집이나 사무실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떨어지는 경우가 없었다. 김일성이 이강국을 종파분자, 지방주의자라고 몰아 붙인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이강국은 외무국장직에 있으면서 조선상사회사란 조직을 만들어 그 사장으로서 서울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때 이강국은 대남 정보공작에 김수임을 적극 이용할 것을 계획하고, 우선 김삼룡의 비서 김형륙과 김수임의 이부동생 최만용을 시켜 멀지 않아 자기를 중심으로 한 통일정부가 수립된다는 것, 또한 자기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옛날을 항상 그리워하며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심정을 전했다.
그리고는 제2단계로 최소한도의 범위 안에서 자기 사업에 협조해주면 고맙겠다는 간곡한 요청도 했다.
훗날 김수임의 진술에 따르면 이강국의 이 말에 김수임은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자기 집을 당의「아지트」로 사용할 것을 승낙하고 자신도 당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공산당으로서는 둘도 없는 안전「아파트」였다.
집주인의 신분은 미 군정의 실력자로 수사기관의 접근이 제한된데다가 실력자 주변이 그러하듯 항시 고위층 인사들이 드나들어 이를 이용해 자유롭게 연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밤이면 밤마다 김수임은 남편되는 미국인으로부터 중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얻어 들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군사기밀, 때로는 고관들의 동향…. 이 모든 것은 바로 앞집에 살고 있는 최만용을 통해 그때 그때 당에 보고하게 했다. 그러나 당대의 권력자 그늘에 숨어「스파이」노릇을 하던 김수임도 수사관들의 끈질긴 추적에 그가 저지른 각종 반역행위를 드러내 놓았다.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에서 자기의 소행이 공산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연인 이강국을 위해, 애정에의 충성을 위한 것이었노라고 주장했지만, 50년6월 사형선고를 받고 짧았지만 정열적이었던 생애를 마쳤다.
내가 이강국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51년 가을 평양에서 내가 건강이 나빠져 시설이 좋다는 속칭「웽그리아」병원(헝가리 의사들이 있는 병원으로 정식이름은 인민군 제58호 병원)에 찾아갔을 때였다.
병원장실로 그를 찾아가니 이강국은 당장 나를 입원시켜 주었다. 그곳은 군 병원이기에 나같은 민간인이 입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나 쾌히 자기 책임아래 입원시켜준 것이었다.
그때 보니까 이강국은 매일 밤 12시 가까이 책을 읽거나 독일어「타이프」를 치곤 했다.
그 2년 뒤 이강국이「미국의 간첩」으로 몰렸을 때, 북한 당국은 이강국이 밤늦게까지「타이프」를 치고 있었던 것은 미국에 보낼 간첩자료였고, 간첩인 그가 병원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이 그 병원을 폭격하지 앉았다고 억지를 썼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정말 김일성 통치하의 북한은 인간이 살 곳이 못된다는 것을 몸소 뼈저리게 실감했다.
서울에서는 김수임이 공산당의 간첩으로 처형됐는데 그와 내통하던 이강국을「미국의 간첩」으로 처단한 북한측의 주장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
결국 공산당이란 자기들에게 이용가치가 있을 때에는 철저히 이용하고 필요가 없을 때에는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것 이외에 다른 말로 풀이할 수 없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김수임이 동거하던 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는 6·25때 거지꼴로 서울거리를 방황했지만, 당시 정치보위부에서 일하던 어린아이의 삼촌인 최만용마저 동정은 고사하고 가장 상스러운 말로 비웃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자의 인간성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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