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판소리 다섯 바탕엔 사람의 도리 다 들어있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5호 08면

안숙선 명창이 즐겨 가는 동네 찻집 ‘새소리 물소리’의 마당. 선생은 사진 촬영하는 동안 목을 풀 때처럼 소리 한 자락을 나지막이 들려줬다.

12월 31일 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특별한 순간.
어떤 노래가, 어떤 공연이 가장 어울릴까.
클래식? 가곡? 신나는 가요? 뜻밖의 메뉴는 바로 판소리다.
국립극장은 2005년부터 한 해의 마지막 날마다
판소리 공연을 마련해 왔는데, 매년 빈 좌석이 없을 만큼
큰 호응을 얻으며 화제 몰이를 하고 있다.
여기에 주춧돌이 된 이가 안숙선(64) 명창.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한 소리꾼이자
‘국악계의 프리마 돈나’라 불리는 안 명창은
지금까지 8년간의 제야 공연 중 5번을 무대에 올랐다.
올해 역시 ‘수궁가’를 완창할 예정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듣는 우리 소리의 의미와 재미는 무엇일까.
25일 안 명창의 서울 세곡동 자택을 찾아 그 이야기를 들어 봤다.

‘수궁가’로 제야 무대 꾸미는 안숙선 명창

가지런한 쪽 머리에 한복을 차려 입은 선생과의 대화는 판소리 한 자락을 듣는 듯했다. 그는 질문을 듣고 한 박자 숨을 고르되 일단 입을 떼고 나면 5분쯤 내리 말을 이어 갔다. 그럼에도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소리를 들려 주며 예를 들어주는 데다 손 사위로 장단을 맞춰 노래하듯 얘기를 끌고 가는 ‘변주’ 때문이었다. 아홉 살부터 배운 소리꾼의 리듬이 일상의 화법에도 그대로 박힌 모양새였다.

-제야의 판소리 무대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2월은 일 년을 마무리하는 때니 들뜬 분위기도 있고, 해서 상당히 파격적인 무대를 찾게 되죠. 그런데 보세요. 정작 마지막 날이 되면 지난 일을 새겨 보고 미래를 준비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판소리가 그럴 때 더없이 좋죠. 판소리 다섯 바탕(수궁가·적벽가·흥보가·심청가·춘향가)에는 우리가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의 도리, 덕목, 순리 이런 게 들어 있어요. 요즘에야 뭐든 성취해야 하고 욕심을 부려야 하는 분위기지만, 소리하는 사람 입장에선 판소리에 담긴 사랑이나 행복, 만남 이런 게 순리로 느껴지죠. (‘부모 돌아가신 뒤 애닳다 어이하리’를 한 소절 부른 뒤) 심청이를 보면서 자식이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흥보가를 보면서 심술 맞은 형이라도 기본을 지켜려고 하는 심성이 무엇인가, 수궁가를 보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혜로 헤쳐나가면 되는 게 인생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난 올 한 해 심청이처럼, 토끼처럼 살았나, 허망한 욕심은 안 부렸나 생각하게 돼요.”

-너무 교훈적인데요.
“판소리가 아주 오래 전 만들어진 얘기인데도 지금과 너무 똑같아서 느끼는 재미도 있죠. 이번에 하는 수궁가를 보면 말이죠. 용왕이 병이 나는데, 토끼 간을 먹으면 낫는다 그래요. 그래서 신하들을 불러들여 누가 갈래 그러는데 아무도 손을 안 들죠. 그렇게 입에 혀처럼 굴던 이들이 정작 용왕을 위해 사지로 갈 용기를 못 내요. 그때 용왕이 ‘아, 내가 헛살았구나’ 그래요. 아마 지금도 윗사람에게 충성한다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판소리는 지루하다는 인식이 큰데요.
“자세히 들어야 해요. 사설을 들으며 음악 구조가 그것에 맞춰 얼마나 잘 짜여 있나 보는 거죠. ‘저 산을 보라’ 했을 때 무대에 진짜 산은 없지만 음악으로 그게 얼마나 높은 산인지 알 수 있어요. 또 심청이가 인당수에 떨어지는 장면을 실제 행동으로 하지 않죠. 부채를 딱 펴서 ‘기러기 낙수 격으로 떴다’ 하다가 부채를 뚝 떨어뜨리면 관객들은 떨어졌구나 상상해요. 판소리는 마술이에요, 마술.”
그는 한두 번만 이렇게 들으면 누구나 판소리 매니어층이 된다고 자신했다. 그러면서 예전처럼 소리를 들어주시고 조언해 주시던 ‘귀명창’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했다. 명창보다 더 먼저 중요한 말까지 꿰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 ‘귀명창’. 소리하는 사람이 힘들어 보이면 먼저 추임새를 넣어 주고, 너무 좋으면 쥐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다 높은 청이 탁 끝나면 함께 숨을 쉬어주는 이들. 20년 전만 해도 ‘귀명창’이 많아서 공연을 보고 나서는 “옷이 너무 화려해서 소리가 죽었다”거나 “비녀가 너무 길었다”거나 같은 모니터링을 해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판소리는 창자(唱者)하고 북, 그리고 관객 셋이 이끌어 가는 예술이에요.”

-판소리 무대에선 관객이 어때야 하나요.
“지금 나랑 얘기하면서도 대꾸를 해 주잖아요. 정말요? 그래요? 이런 식으로. 판소리도 마찬가지예요. 흥이 나는 순간 저절로 관객들이 표현해 주는 게 좋죠. 클래식 공연처럼 다 보고 난 뒤 박수를 힘껏 친다거나 마지막에 앙코르를 외치는 것과는 좀 달라야 하는데, 이 역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모르는 거죠.”

-무대에 서서 관객들이 다 보이세요?
“그럼요. 소리 하다 관객들이 두리번거리면 ‘이번 무대는 망쳤구나’ 그런 생각을 하죠.”

선생과 제야 무대에 서는 한승석(사진 왼쪽)·남상일 명창.

올해의 제야 무대는 선생의 제자인 남상일(34)· 한승석(45) 명창과 분창으로 마련한다. 도입부와 마무리를 선생이 맡고, 나머지 중간을 두 사람이 채운다. 남상일 명창은 어릴 적 일찌감치 주요 판소리 대회를 휩쓸며 판소리 신동의 면모를 보여준 인물. 국립창극단 입단 이래 주역을 도맡아 하며 간판 스타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방송에서도 활동하며 대중적 인지도도 높다.

한승석 명창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사물놀이 동아리 활동을 하며 국악과 인연을 맺었다. 단단하면서도 위엄 있는 소리를 구사하는 노력파로, 현재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선생에게 이 두 사람과 분창하는 이유를 물으니 “체력적으로 힘들어서”라며 웃다가 “라이벌이 있어야 더 잘 된다”고 눙을 쳤다.

-두 분을 택한 이유는요.
“서로 겨뤄볼 만한 아이들이에요. 각자 장단점이 있으니까 단점들을 어떻게 뛰어넘나 이번에 보는 거죠.”

-어떻게 제자로 인연을 맺었나요.
“남상일은 제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있을 때 전통예술원 1기생으로 들어왔어요. 천성적으로 타고난 소리꾼, 재간꾼이라고 봐요. 날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의 맥을 잘 이어갈 사람이고요. 한승석은 20년 전에 어떤 공연에서 만났어요. 꽹과리를 치고 있었는데 공연 끝나고 소리를 들어보니 꽤 잘하더라고요. 나한테 배우고 싶으면 찾아와라 해서 공연했던 아이들 4명이 같이 왔었는데 결국 혼자만 남더라고요. 타고나기는 남상일만 못하지만 학구파이면서 잠시도 쉬지 않는 노력파죠. 다른 데는 돌아보지도 않아요. 나는 이 둘 중에 과연 골인지점까지 누가 명분 있게 갈 것인가 지켜보는 거죠.”

-이들에게 무슨 가르침을 주시나요.
“제 선생님들은 소리에 대한 자긍심이 목숨을 걸 정도였어요. 소리 자체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생의 평가를 거기에 걸었죠. 소리라는 게 그런 거라는 걸 저도 제자들에게 똑같이 알려주고 있죠.”

선생은 국악 명가에서 태어났다. 9살 때 가야금 명인인 이모 강순영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웠고, 외당숙은 동편제 거목 강도근 선생이다. 가야금을 퉁기면서 손끝에서 피가 나도록, 판소리를 하면서는 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악보도 녹음기도 없이 오직 스승이 한 번 보여주는 소리만을 기억해 연습을 하며 진도를 나갔다. 운 좋게도 이후 국내 최고의 선생을 모셨는데, 19살 때 고향인 남원에서 서울로 올라와 당대 최고의 김소희 명창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했다. 박귀희 선생에게는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1997년 그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병창 기능보유자가 되기도 했다. 지금껏 살면서 소리가 당연히 ‘내 운명이구나’ 했을 것 같은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결혼하면 관둬야지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소리꾼이 나서는 무대가 너무 허술해서요. 그런데 1979년에 국립창극단이 생기면서 마음을 바꿨죠.”

2012년 선생의 제야 판소리 완창 무대.

입단 뒤로 뛰어난 성음과 연기력으로 주역을 도맡았고 단장·예술감독을 거쳐 최근까지 원로단원으로 활약했다. 1986년부터 1999년까지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 공연을 했고, 유럽 7개국, 영국 에딘버러 축제에서 춘향가 완창 순회 공연도 벌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으로 있다.

-예술감독을 맡으면서 소임이라 생각한 것이 있다면요.
“사실 요즘 일관되게 작업하는 게 판소리가 주가 되는 창극을 만들어 보는 거예요. 전통문화가 사라질까 봐 무형문화재도 만들고 국악과도 많아지고 하는데 정작 우리 음악이 우리 삶을 보여주지 못하고 원형 보존에만 힘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대중들은 이미 많은 다양한 문화를 즐기게 됐는데 전통 음악만 이러고 있으니 더 어려워진 분야가 된 거죠. 정통성을 잘 유지하면서 대중성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게 과제인 것 같아요. 이동 무대를 만들어 보거나, 의상을 화려하게 해 보거나 그렇게 변화시킬 필요가 있죠.”

-전통을 거스른다는 부담감은 없나요.
“1980년대에는 제 소리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았으니까 그저 판소리는 없어지지 않겠구나, 안심했어요. 그러다 충격을 받은 일이 한 번 있었죠. 신년 음악회로 교향악단이 편곡한 전통음악을 했는데, 연습하고 무대 뒤로 들어가다 연주자 한 명이 그러는 거예요. ‘판소리를 처음 듣는데 참 좋네’라고요. 아니 그래도 음악을 한다는 사람인데 판소리를 처음 듣는다는 말이 너무 놀라웠죠. 그 다음부터 공연장만 오라고 하지 말고 내가 먼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방송에 나가기도 하고 편곡해서 부르기도 하고 그랬죠. 김덕수씨랑 수궁가 이야기로 ‘래빗 스토리(Rabbit Story)’라는 앨범을 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요.”

선생은 2015년까지 남도의 굿, 남원의 창극, 부산의 춤 등 각 지역의 특기를 살리고 녹여내 종합극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외국의 오페라·뮤지컬처럼 ‘우리의 극’ 형태를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다. 내년은 이를 위한 준비기간이 될 터다. “복잡하고 부담스러운 일이 많으시겠다” 했더니 역시 소리꾼다운 답을 했다. “소리를 못할 때나 그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래서 난 살아있는 동안은 그냥 소리만 할랍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