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알겠나 내 절친이 진짜 적일지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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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호 24면

※본문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대세트라곤 구치소 철창 앞에 놓인 썰렁한 테이블과 의자 두 개뿐. 어둑한 조명 속 두 남자가 관객을 향해 말을 건다. 둘의 대사는 독백인 듯 대화인 듯 따로 또 같이,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듯 잘 엮이지 않는다. 앉았다 일어섰다, 가끔 의자를 발로 차는 것 외엔 액션도 거의 없다.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나는 극이라니, 엄청나게 지루할 것 같지 않은가.

연극 ‘스테디 레인’ 12월 21일~2014년 1월 29일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그런데 이 무대, 오히려 시간을 잊게 만든다. 말끝마다 욕설을 붙이는 마초와 어딘가 움츠린 느낌의 샌님, 너무도 다른 두 친구가 바통을 이어가는 이야기에 ‘도대체 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귀를 쫑긋 세우다 보면 두 시간이 거짓말처럼 흘러 있다.

할리우드 스타 휴 잭맨과 대니얼 크레이그의 동반출연으로 유명한 2인극 ‘스테디 레인’의 한국어 공연이 막을 올렸다. 2009년 브로드웨이 최고의 흥행연극이자 타임지 선정 ‘2009년 Top 연극’ 2위에 올라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이후 세계를 돌며 공연 중이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화도 추진 중이다.

스타의 이름값에 ‘최고 흥행연극’이 됐다지만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다. 극적 상황을 시각화해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옛이야기처럼 오로지 언어를 통해 ‘스토리’를 ‘텔링’하는 방식. 관객은 목격자의 진술에 의존해 범인의 몽타주를 그리는 형사처럼 두 남자가 각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사건의 진실을 스스로 몽타주 해내야 한다. 그러니 불편할 수밖에. ‘흥행 연극’이라는 수사에 감각적 재미를 기대하고 온 ‘준비 안 된’ 관객들은 사지를 비비 꼬다 중간에 우르르 자리를 뜨기도 한다.

사실 준비된 관객에게도 만만찮다. 관극 내내 이런 의문이 든다. ‘영화였다면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한 본격 느와르로 그려졌을 소재를 왜 굳이 어렵게 전달할까’. 속사포처럼 퍼붓는 방대한 대사의 홍수 속에 두 남자의 진술은 서로 엇갈리고, 사건의 순서도 뒤죽박죽 섞여 막이 내릴 즈음에야 극의 전모를 짜깁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친 대니와 조이는 번번이 형사 진급에 미끄러지는 시카고 하급 경찰들. 단란하게 꾸린 가정을 위해 온갖 불법으로 돈을 모으는 대니는 술과 고독에 찌들어 자살 직전에 이른 조이를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챙겨준다. 조이는 점점 대니의 가족을 동경하게 되고, 어쩌다 희대의 연쇄살인마 사건에 말려들어 인생의 위기를 맞은 두 사람. 가족을 지키려 날뛰는 대니의 뒤에서 조이는 대니의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의 반 타의 반 대니를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결국 대니의 빈자리를 차지한다.

두 남자의 겉모습은 매우 평범하다. 경찰이라지만 제복은 물론 최소한의 분장도 하지 않은 듯하다. 연기가 아닌 그저 얘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이들의 세계가 두 남자의 우정과 배신에 관한 영화 ‘신세계’를 닮았다는 생각이 스친다. 단순 무식해 온갖 불법과 악행을 일삼지만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황정민은 대니와, 정의를 위해 고뇌하는 듯 보였던 이정재는 조이와 겹쳐진다. 끝까지 속을 알 수 없던 이정재가 변명과 자기 합리화를 늘어놓는 꼴이랄까. 그저 두 시간 즐길 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영화 속 먼 이야기가 무대 위 평범한 차림새를 하고 선 배우들의 입을 통해 이면에 감춰진 심리의 고백이 되니 마치 나와 내 친구의 이야기처럼 바짝 다가들어 두고두고 곱씹게 만든다.

“악마 눈을 보면 그게 악마 눈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알아야 하는 거야. 악마 눈깔을 보면 그게 악마 눈깔인지 알아야 하는 거라고. 아니면 결국 악마랑 친구하고 있는 꼴이 된다고.” 외부의 적과 사투를 벌이면서 내부에 있던 진짜 악마를 알아보지 못했던 대니의 대사들은 우리를 향한 의미심장한 경고의 메시지로 들려온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의 진짜 적은 뉴스 속 흉악범이 아니라 내 스스로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인 가장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다는 섬뜩한 진실은 외면하고 싶지만 때론 직시해야 하는 인간관계의 어두운 몽타주다.

그래서 이 무대는 거창한 철학을 논하는 관념적인 대사는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지만 밑바닥 인생들의 거칠고 투박한 삶의 언어로 쓰인 냉철한 인간론에 다름 아니다. 조금도 보여주지 않지만 다 보여준 것보다 더 구체적인 그림들이 뇌리에 남는 것은 오직 언어의 힘이요, 선명도의 차이는 온전히 배우의 역량에 달렸다. 이석준-이명행 베테랑 형님 콤비와 문종원-지현준 블루칩 아우 콤비가 각각 그려내는 화폭은 그 색채와 질감이 분명 다를 터. 선택도 해석도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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