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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하버드 우등생의 노하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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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성호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

그는 형편이 빠듯했습니다. 하버드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으면서도 혼자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 사감을 맡았습니다. 그걸 7년이나 했습니다.

 하버드대의 공부량은 상당합니다. 시험 때는 하루 18시간 이상 공부하고, 잠은 고작 2~3시간씩 잡니다. 혹독한 일정을 소화해야 합니다. 수시로 내는 에세이 등 과제물도 만만치 않습니다. 오죽하면 하버드 졸업생들이 이런 말을 할까요. “하버드만 졸업한 뒤에는 인생이 아주 쉬워진다(After Havard, life is so easy).”

 그는 기숙사 사감을 하면서 많은 학생을 만났습니다. 하버드대에선 공부만 잘한다고 ‘최고’가 되지 않습니다. 클럽 활동이나 봉사활동도 아주 활발하게 하면서, 공부까지 잘해야 “쟤는 공부 좀 한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평소에는 설렁설렁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이 기가 막히게 좋은 학생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사감을 하면서 그들을 유심히 봤습니다. 그랬더니 비밀 노하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건 정말 맨입으로 안 되는데”라며 그들의 노하우를 귀띔해줬습니다. 핵심은 ‘예정보다 10일 먼저 해치우기’. 다시 말해 일정을 열흘 앞당겨서 일을 해나가는 겁니다. 읽어야 하는 책, 써야 하는 에세이, 발표 준비 등을 모두 10일 앞서서 처리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힘이 듭니다. 열흘 분량의 진도를 미리 빼야 하니까요. 예전의 습관 탓에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결국 그도 ‘10일 먼저 사는’ 우등생이 됐습니다. 그가 누구냐고요? 최재천(이화여대 석좌교수) 국립생태원장입니다.

 그 노하우를 들으면서 ‘현문우답’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음은 밭입니다. 할 일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하고 생각의 씨앗을 먼저 심어야 합니다. 씨앗은 심지 않고 “하긴 해야 할 텐데”라며 계속 미루면 불안만 커집니다. 그러다 마감이 코앞에 닥쳐서야 씨앗을 심습니다. 그럼 싹이 트자마자 ‘싹둑’ 베어서 수확해야 합니다. 완성도는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열흘 먼저 씨앗을 심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싹이 일찍 틉니다. 그럼 계속 깎고, 다듬을 수 있습니다. 마음밭에는 묘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 하고 생각의 씨앗을 정확히 심어두면 어김없이 싹(해결책)이 올라옵니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네. 그럼 저 문제는 어떻게 풀지?” 시간이 지나면 또 싹이 올라옵니다.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군.” 열흘간 아이디어의 싹이 계속 올라옵니다. 그걸 적용하며 우리는 자꾸 깎고 다듬습니다. 마감이 가까울수록 결과물은 점점 ‘완성’에 가까워집니다. 마음의 밭은 이모작, 삼모작이 아니라 백모작, 천모작도 가능합니다. 마음은 무한생산이 가능한 밭입니다.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최 원장의 책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컴퓨터에 붙은 포스트잇에 ‘오늘 할 일’이 빽빽하게 적혀 있더군요. “저 많은 일을 어떻게 다 처리하지?” 싶더군요. 그는 여유가 넘쳤습니다. 실제 마감은 10일 후니까요. 마음의 밭은 여유가 있을수록 싹이 더 잘 올라옵니다.

 뒤늦게 알았습니다. 베토벤도 그랬더군요. 악상이 떠오르면 스케치를 해놓고, 때로는 수년에 걸쳐 깎고 다듬었습니다. 실제 그의 악보는 하도 고쳐 쓰느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악성(樂聖)’이란 칭호를 그냥 얻은 게 아니더군요.

 올 한 해 많이 쫓기셨나요? 새해에는 ‘열흘 먼저’ 살아보면 어떨까요. 혹시 아나요. “열흘 후에는 인생이 아주 쉽더라(After 10 days, life is so easy)”라고 말할는지. 그럼 이 칼럼 원고는 언제 썼느냐고요? 잠깐, 논설위원실에서 찾네요. “네에! 원고요? 아, 거의 다 됐습니다. 5분 안에 넘길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