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지「사할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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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할린」사람들도 「알자스」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을 걸어왔다. 국적이 몇 번을 바꾸었는지 모르는 것이다.
「사할린」이 일본과 「러시아」의 공동 영토가 된 것은 1855년부터였다. 그후 20년에 걸친 권리다툼 끝에 「세인트피터스버그」조약에 의해 일본은 「사할린」을 방기하고 대신 「쿠릴」(천도)열도를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자 「사할린」의 북위50도 이남의 땅은 일본영토가 되었다. 이름도 「화태」란 옛 이름을 찾았다.
2차 대전에서 일본이 지자 47년부터 화태는 다시 「사할린」이 되고 소련 영이 되었다.
그러나 실상 이처럼 끈질긴 영토다툼이 있을 만큼 「사할린」이 기름진 것은 아니다.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아 짧은 여름과 긴 엄동의 두 계절밖에는 없다. 눈은 10월부터 5월까지 내린다. 산밑에는 8월까지도 잔 설이 녹지 앉는다.
이곳을 「러시아」사람들은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주로 유형지로 썼다. 그만큼 마냥 춥기만 한 곳이다. 1년 중의 평균온도가 영도이하인 것이다.
살기가 어려워 한국 농민들이 북간도로 몰려갈 무렵에 화태에도 5천명 가량이 이주해 갔었다.
2차대전이 터지자 이곳에 사는 동포 수는 4만 여명으로 늘어났다. 모두 20대와 30대의 젊은이들.
자의로 간 게 아니다. 거의 모두가 탄광노동을 위해 징용되어 간 것이다. 그들도 이제는 60고개에 들어섰다. 삶의 불꽃을 엄한의 유형지에서 소진시켜버린 것이다.
패전이 되자 이곳에 있던 4만명의 일인은 모두 본국으로 질환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만은 그대로 발묶여 버리고 말았다.
왜?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노동력을 거저 쓰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란 수량의 역학이다.
북위50도의 유형지에 갇힌 한 주먹(?)의 『무국적성』들의 운명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도 본국사람들은 바빴던 것이다.
아무 것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과연 몇 만 명이나 「사할린」에 징용 자로 끌러 갔는지, 지금 몇 명이나 살아남았는지조차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그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시베리아」의 유형 자들보다도 더 가혹한 상황 속에서 삶을 이어나갔을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이들이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게 되었다. 물론 몇 명이나 돌아올 수 있을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때에 소련 측의 태도가 누그러진 데에는 뚜렷한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들을 꼭 묶어 두어야 할 뚜렷한 이유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정치란 비정하고 잔인하다는 생각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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