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죽음과 공존했던 「헤밍웨이」의 생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두 번 자살위협을 하다가 세 번째 성공한 「어니스트·헤밍웨이」가 그의 아내 「메어리」여사에게 들려준 최후의 음성은 죽기 하루전인 1964년7월1일 『투티·미·기아마노비온다』(그들은 나를 「블론드」라고 부르죠)하고 시작하는 즐거운 「이탈리아」노래 마지막 대목의 화창이었다. 「헤밍웨이」는 저녁을 먹고 돌아와 이를 닦다가 아내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튿날 아침 그는 지하창고에 내려가서 잠가둔 열쇠를 열고 비둘기사냥에 쓰던 쌍발「보스」총을 꺼냈다.
아침 7시40분 「스코트·얼」박사는 눈썹 바로 위에 두발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세기의 문호 「헤밍웨이」의 「상오의 죽음」을 목격했다
『누구를 위해 총을 울리나?』『무기여 잘있거라』『가진 자와 안가진자』『살인자』로 이른바 「하드·보일드·스타일」이라는 「헤밍웨이」특유의 문체를 20세기 문학에 유행시킨 「파파」의 마지막 말소리는 총성에 지워졌고 그 총도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메어리」여사와 「애트킨즈」는 만년의 의식에 부조현상을 드러낸 「헤밍웨이」자살의 흉기가 기념품수집광의 손에 들어갈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케첨」근처의 아무도 모를 곳에 조각조각 「블로·토치」로 작살을 내어 묻어버리고 만 것이다.
「헤밍웨이」처럼 죽음을 수시로 의식하고 결국 죽음을 스스로 택한 작가는 많지않다.
그는 1918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다리에 부상을 하고 누워 있을 때 처음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주위는 온통 중기관총사격에 맞아 쓰러진 시체뿐이었다.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자살의 무기는 허리에 차고있던 장교용 권총이었다. 눈사태에 묻히지 않고 「스키」를 타다가 죽는 것이 「로맨틱」하게 목숨을 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폴린」에게 1925년 「크리스머스」까지 그들의 정사에 결말이 안나면 죽어버리겠다고 말했다가 자살계획을 연기하기도 했었다. 그는 어머니 같은 「폴린」에게 자기만 죽어버리면 유부녀 「폴린」이 「해들리」와 이혼할 필요도 없고 죄는 자기가 지고 지옥에 가는 것이니까 괜찮다고 썼었다.
작가 「피츠제럴드」에게는 자기가 정말 죽는다면 「개스」관을 반쯤 열거나 손목의 겉가죽만 자르는 겁장이 노릇은 안할 것이라고 뻐기던 것도 그 무렵이다.
『하오의 죽음』을 탈고한 다음이었다. 1936년 그는 「맥리시」에게 쓴 편지에서 인생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쏴 죽여야 할 시기가 온다는 것은 『매우 역겨운 노릇』이라고 고백했다.
39년 그는 친구인 「클래러·스피겔」여사에게 서로 자살의 유혹을 강렬히 느끼면 상대에게 먼저 알리자고 말했다가 그녀가 거절하는 바람에 당황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1944년9월13, 14일 22보병연대에서 6명의 장교와 61명의 사병이 전사했다는 보도를 들은 「헤밍웨이」는 시를 썼다.

<그는 어제만 하여도 그년을 세번이나 거부했지만 지금은 늙은 갈보인 죽음을 끼고 그는 잠자고 있다. 자네는 이 갈보년이 합법적으로 결혼한 처라고 생각하나? 나를 따라 복창하게, 67번을, 그렇다고, 그렇다고….> 이런 시를 쓴 「헤밍웨이」의 죽음에 대한 집념은 「아프리카」에서 비행기사고로 입은 정신의 상처(트로마)가 조금도 개선시키질 못했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보이는 영적인 죽음에의 애착은 마침내 이 어눌한 작가에게 죽음을 선택하는 길로 치닫게 만든다.
「미시마·유끼오」「가와바다·야스나리」같은 일본작가가 자살소동을 벌이기 훨씬 전 현대의 비정과 감성의 불모를 극명히 그리다가 지친 또 하나의 「노벨」상 작가는 자연의 섭리를 배반했던 셈이다. 【DPA】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