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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함수관계 지닌 영 상류사회의 스캔들|<런던=박중희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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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24일 영국 국회의사당의 방청석은 실로 10년만에 초만원을 기록했다. 최근의 「섹스·스캔들」에 관한 「히드」수상의 보고를 들으려고 쇄도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10년 전의 초만원 사례도 「섹스·스캔들」덕분에 이뤄졌었다. 당시의 국방상 「프러퓨모」와 「크리스틴·킬러」간의 염문에 대해 「맥밀란」수상이 보고를 하게 되자 언제나 텅텅 비던 방청석이 삽시간에 꽉 찼던 것이다.
그러나 「프러퓨모」사건과 이번 「스캔들」간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프러퓨모」전 국방상은 서민출신의 입지전적 인물이었던데 반해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램턴」국방차관과 「젤리코」국새상서(총무처장관)는 한결같이 귀족출신이라는 점이다.
영국인들이 10년 전보다 더욱 기승을 부리며 이 사건을 주목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들이 「귀족」이라는 사실 때문인 듯 하다. 이름 앞에 반드시 「서」(경)자를 붙이는 별종들이 소장수 딸과 벌거벗고 기념촬영을 했다는 얘기는 각별한 흥밋거리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영국인들 말마따나 『금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나서』 『특별히 병신 짓을 하지 않는 한 죽기 전에 장관 한번은 꼭하게 마련』인 것이 이들『「서」족』이고 보면 국회의사당 방청석이 메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사실 이들 『「서」족』이 형성하는 이른바 상류사회는 「스캔들」면에서 상당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도끼로 목을 잘라 이혼식에 대신하면서 6명의 왕후를 맞아들였던 「헨리」8세, 「로이드·조지」와 「파머스턴」수상의 끊일새 없던 염문 등은 질·양 어느 모로 따져 보더라도 이번 「스캔들」이나 「킬러」사건을 압도하는 것이다.
상류사회의 무절제한 사생활이 정치생명과 함수관계를 갖게 된 것은 「빅토리아」여왕 때부터이다.
평생을 처녀로 살았던 여왕인지라 부하들이 결혼하는 것까지는 참고 봐줬지만 혼외정사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보복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처녀의 「히스테리」가 영국상류사회의 「섹스」질서 확립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상류사회사의 뒤안길을 뒤적여 본 전문가들에 의하면 「질서확립」은 어디까지나 겉보기일 뿐 「세살적의 버릇」은 은밀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와 같은 사실은 쉬쉬하는 중에서도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비밀』로 공인되어 왔었다. 따라서 「램턴」경과 「젤리코」경이 이번에 덜컥한 것은 공정하게 말해서 『운수 탓』일 따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말하자면 「2인의 경」은 비록 거룩하달 것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동료귀족들을 위해 십자가를 진 것만은 틀림없다는 동정론이다.
하긴 이 주장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게 사실이다.
현재 「2인의 경」이 궁지에 몰린 이유 중에는 이들이 고급춘화들과 어울리는 사이에 국가기밀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혐의」를 일소에 붙인다. 영국이 아직 일류대국이었던 1919년의 「베르사유」회의 때는 대표단 숙소의 윗문으로 매일 밤 「콜·걸」들이 쏟아져 들어갔었지만 「기밀누설」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한다.
한데 지금은 2류국의 대열에서도 끄트머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처지인데 뭣 때문에 그런 문제로 신경질을 부리는가고 반문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나라가 기우니까 공연한 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번 「스캔들」에 영국인들이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주인공들이 모두 귀족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게다가 이들의 상대가 유색인종과 소장수 딸이니 아무리 「생각한 다음에 뛰어가는」 영국인의 기질일지라도 귀가 번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프러퓨모」사건이 「맥밀란」수상의 퇴진으로 연결되었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터이므로 「윌슨」노동당 당수도 「히드」수상 못지 않게 바쁘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가시 돋친 독설을 부지런히 쏘아대면서 이제나저제나 내각 총사퇴 발표가 나오지 않나 기다리는 눈치이다.
예컨대 「램턴」경이 상대한 「콜·걸」들의 국적이 「에이레」·서인도제도·중국 등으로 다변화하자 『보수당은 매춘조직도 다국적 기업화하고 있다』고 몰아붙이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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