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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휴전회담(후반부)(8)|이 대통령의 항거(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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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유엔」군 측이 송환 반대 포로의 중립국 이관에 동의 안 5·16 제안을 내놓은 지 5일 만인 1953년 5월30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고, 중공군의 한국 잔류를 허용하는 휴전 결정은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지 간에 한국에는 항 고권 없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말하였다. 이 대통령은 북한이 중공 및 소련과 각각 군사 조약을 맺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휴전협정 조인 전에 한미 양국이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였다.
또한 이 서한에서 한국군의 증강과 미 해·공군의 잔류를 희망하면서 만약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한국 민은 싸움을 계속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 휴전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한국이 바라는 최소한의 반대급부를 요구한 것이다.

<미, 이 박사 요구 교묘히 피해>
한편 공산 측은 6월4일에 이르러「유엔」군의 5·16 제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여 휴전은 눈앞에 다가온 듯 하였다.
그 이튿날인 5일에「아이젠하워」대통령은 앞서의 이 대통령 서한에 6일만에 회신을 보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을 때는 미국은「필리핀」·호주·「뉴질랜드」 체결된 것과 같은 선에 따라 속히 한국과 강호 방위조약 체결 교섭할 용의가 있다. ②미국은 황폐화한 국토의 부흥을 가능케 하기 위해 한국에 경제 원조를 계속하겠지만 이는 국회의 지출 승인이 필요하다는 두 가지를 약속하고는 이어 미국 입장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였다.
『한국의 통일은 제2차 대전 중의 제 선언이나「유엔」이 한국에 관해 발표한 제 원칙에 따라 미국이 제삼 약속한 목적입니다. 불행히도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분열 상태에 놓인 유일한 국가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 미국은 계속해서 모든 분단국가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할 결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수단을 전쟁에 의지할 생각은 없는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이와 같은「아이젠하워」대통령의 회답을 받고 크나큰 실망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아이크」회신은 한국이 제시한 조건을 요리조리 교묘히 피한 것으로 판단했다. 우선 한미 상호 방위조약도 휴전 조인 전이 아니라 후에 교섭해 보자는 것이고, 한국 통일에 대해서는 사실상 포기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이 대통령으로서는 마지막으로 건곤 일 척의 항거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윌8일에 드디어 포로 송환 협정에 쌍방이 서명하고 휴전이 임박하자 서울의 긴장과 불안은 드높아 갔고, 이에 따라 이 대통령에 대한「워싱턴」의 무마와 설득도 절정에 달하였다.
이 무렵에「아이젠하워」대통령은 이 대통령에 대한 회유의 한 방법으로 그의 방미를 제의했으나, 일축 당했는데 이때의 상황을 몇 기록에서 살펴보겠다. 먼저「아이쿠」회고록 (Mandate for Change 1953∼1956)과 「로버트·J·도너번」저「아이쿠」내막 이야기 (Eisenhower : The Inside Story)에서 간추린 것. 다분히 아전인수격으로 기록돼 있다.

<휴전회담의 결함 거듭 지적>
『이 무렵에 나는 이 대통령이 우리와 의견 교관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으면 했다.「브릭스」대사 보고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방미 초청을 기뻐하며 양국이 개별적인 견해 차이는 있지만,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서울에서 맹렬한 휴전 반대「데모」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덜레스」관에게 이「데모」를 오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미국은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되풀이하면서 자기도 한국군을 사용해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사전에 「클라크」장군에 통고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는 정세가 불안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 시기에 방미하는 것을 사절하였다. 그는 초청은 감사하나 짧은 기간이나마 한국을 비워 둘 수 없다고 하였다.
거꾸로 그는「덜레스」장관에게 서울에 오라고 요청하였다. 이 생각은 표면상으로는 매력적인 것 같이 보였지만 입장이 거북한 점이 없지도 않았다. 「덜레스」장관은 이 대통령에게 휴전 수락 설득을 하는 동시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만약「델레스」장관이 서울에 가서 한국의 안전 보장과 앞으로 개최될 정치 회담에서의 공동 행동에 대해 특정한 확약을 준다면 우리는 이 대통령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고 협력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우리는 이 대통령이 적어도 휴전을 지지할 입장을 취할 때까지는 국무 장관 이외의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덜레스」장관은「월터·로버트슨」국무 차관보나 국무성 고문「더글러스·맥아더」 2세를 추천하였다.
6월17일에 이 대통령은 나에게 서한을 보내고, 곧 조인 단계에 놓여 있는 휴전협정의 치명적 결함을 또 되풀이 지적하였다. 그는 또한 이때까지의 미국 원조에 감사하면서도 서한의 전체적 내용은 매우 감정적인 것이었다.
이 대통령의 서신을 보고 우리는 퍽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대통령 서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폭탄은 터지고 말았다. 6월18일, 2만7천명의 송환 반대 한국인 포로들이 수용소로부터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편「마크·클라크」사령관도 포로 문제가 체결되고 휴전 협정 조인이 임박할 무렵 다시 이 대통령을 방문하였다. 반공 포로 석방 전에 마지막으로 6월7일 이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의 정경을「클라크」대장은 그의 저기「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공산 측에서 우리의 5·16최종 제안을 수락한 다음날인 6월5일에 나는 또「브릭스」대사와 휴전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이 대통령에게 통고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우리들은 이 대통령에게 한-미 상호 방위조약만 맺게 된다면 휴전에 협조하겠느냐고 타진해 보았다. 그는 묵묵 부답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우리가 경무대를 나온 후 다음의 4개조건만 충족된다면 휴전을 지지할 수도 있다고 성명 하였다. 그 조건이란 한미 방위 조약의 체결, 미 해·공군의 한국 근 역 주둔, 미국의 군경 원조 제공, 외국군의 동시 철수 등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예측한 것보다 온화한 것이며, 또 이 대통령이 나와의 사전 협의 없이는 「유엔」군 처지를 위태롭게 하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겠다고 재삼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잘되나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으로 2일 후인 6월7일에는 나 혼자서 또 이 대통령을 방문하였는데 나의 약관은 단번에 부서져 버렸다. 이 대통령과 나와의 관계를 측정하는 가장 정확한 청우계는 회담 전 후에「프란체스카」여사가 한자리에 나타나는가, 않는 가로 알 수 있었다.

<국군만으로 전투 계속 다짐>
나는 여사가 이 대통령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대통령과 나 사이의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는 보통 회의 전이나 후에 부인은 자리를 함께 하며 차와 과자를 대접하고 했다.
오지리 태생인 부인은 나도 2차 대전 후 그곳 점령군 사령관을 지낸 적이 있어 공통적인 화제를 가질 수 있었다. 휴전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나 사이가 서먹서먹해질수록 부인을 뵐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6월7일에도 이 대통령 부인은 볼 수 없었다. 대통령과 그의 의견만이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절망과 반항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대통령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또 같은 내용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는 휴전 협정을 그대로는 절대 수락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가령 그것이 자살을 의미한다고 해도 대한 민국 군대는 그대로 싸움을 계속하겠소. 지휘는 내가 직접 하겠소.」
이렇게 말하고 그는 공산주의와의 유화정책을 취함으로써 미국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하였다.
나로서는 미국이 한국의 정당한 목표 달성을 위한 노력을 언제나 지지하겠지만 현재로서는 휴전을 성립시킬 결심임을 설명하려고 무척이나 애쓸 따름이었다.

<6월18일 사태로 세계는 경악>
나는 반공 포로들을 공산 측 심문자들이 말썽을 일으킬 기회도 적고 한국 본토에 발을 올려놓을 구실도 얻을 수 없는 제주도나 거제도 같은 섬으로 이송시키는 가능성을 제의해 보았다. 대통령은 이 제의는 묵살한 채「앞으로 어떤 행동이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취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고만 말하였다. 나는「한국군을 유엔군 사령관 휘하에서 빼내겠다는 뜻입니까?」라고, 물은즉「오늘 내일의 일은 아니니까 일이 그쯤 될 때에는 사전에 당신과 협의하겠소」라는 대답이었다. 결국 이번 방문도 허탕이었다.
이 대통령이 어떤 가공할 행동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그의 타협을 얻기 위한 최종적인 노력으로「아이젠하워」대통령은 공식적이지만 비밀리에 이 대통령의 방미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 중대한 시기에 한국을 떠날 수 없다고 그 초청을 사절하고 대신「델레스」국무장관의 서울 방문을 희망하였다. 이때「델레스」가 서울에 갔더라면 한국이나 아세아 전역에 있어서 이 대통령 위신을 한없이 높여 주었을 것이다. 「델레스」장관은 의회가 휴회에 들어갈 때까지 자기의「워싱턴」체류를「아이젠하워」대통령이 희망하고 있는 만큼, 대신「월터·로버트슨」극동 담당 국무차관보를 서울에 보냈으면 한다고 문의했다.
6월17일, 이 대통령은「로버트슨」차관보의 서울 방문에 등의 하였다.
그 다음날인 6월18일, 이 대통령 명령에 따라 포로수용소의 지옥의 문은 모조리 개방되었다.』

<주요일시> (1953년 3월5일∼8일)
※5일▲미군 기, 청진 공업 지대 폭격 ▲「클라크」사령관, 동부 전선 시찰 ▲「스탈린」 사망 ▲「아이쿠」「스탈린」사망에 조의 표명.
※6일▲봉암도 수용 포로 소요 ▲공보 처장에 갈홍기씨 임명 ▲「아이쿠」긴급 각의 개최 코「스탈린」사후의 정세 검토 ▲소련 공산당 중앙위, 국민의 단결 호소
※7일▲거제도 수용소 포로 폭등 23명 사망, 42명부상 ▲경남서 병역 기피자 6백 명 적발▲팽덕회, 재 한 중공군에「스탈린」사망 추도「메시지」전달
※8일▲「미그」기 7대 격추 ▲주은래 일행,「스탈린」장례식 참석 차 착 소

<알림>다음 회부터『반공 포로 석방』을 다음 계획이오니 관계 사진을 갖고 있는 분은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화는 (28)-8211 (교환)의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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