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성탄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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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호 30면

고등학교 1학년 겨울이었다. 날씨가 흐렸다. 금방이라도 비나 눈이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무거웠다. 우산이 없었는데 다행히 버스를 탈 때까지 비나 눈은 오지 않았다. 나는 거의 혼자 버스를 타고 다녔다. 우리 동네에서 그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한 녀석도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가 좋았는데. 나는 자주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은 감상에 젖곤 했다. 내 옆자리 창 쪽에는 초록색 코트를 입은, 코트 왼쪽 깃에 빨간색 알파벳 B자를 단 아가씨가 귤 봉지를 들고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눈발 섞인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바깥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 비는 풍경에서 색을 지우고 형태를 뭉갠다. 졸음이 몰려왔다. 처음엔 깨닫지 못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버스가 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고관입구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아무리 가도 고관입구가 나오지 않았다. 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었다. 비가 오니까, 아니 눈이 오니까, 차가 막히니까….

그러다 혹시 하는 생각으로 버스의 번호를 확인했다. 다른 버스였다. 나는 내가 타야 하는 버스 번호와 아무런 유사성이 없는, 모양도 발음도 전혀 다른 번호의 버스에 타고 있었다. 단순한 착오에서 생긴 실수였지만 나는 내 실수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버스 천장의 불빛은 어두웠고 승객은 몇 명 없었다. 승객들은 말이 없었다. 무거운 고요가 버스 안에 가득했다. 문득 그들이 고개를 돌리면 얼굴이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빨리 버스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표정한 아저씨 둘이 내리는 정류소에는 내리기 싫었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정류소에는 더욱 내리기 싫었다.

그때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일어섰다. 나는 얼른 그 누나를 따라 내렸다. 거기가 어딘지는 몰랐다. 눈은 부지런하게 내려 거리와 건물에 쌓이고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떠난 후 거리에는 차도 다니지 않았다. 이 지상에는 오직 그 누나와 나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우산을 펼쳐 쓴 누나가 버스 정류소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가자 나는 무작정 누나를 따랐다. 그곳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었다.

골목을 지나고 계단을 올랐다. 얼마나 갔을까? 누나가 멈춰 섰다. 보안등 아래 불빛 속으로 하얀 눈들이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누나가 돌아섰다. 이제 보니 누나는 중학교 때 좋아했던 교생 선생님이다. 내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어보라고 추천하던. 너 나 따라온 거야? 버스를 잘못 탔어요. 그럼 집으로 가는 버스를 다시 타고 가면 되잖아. 그렇죠. 그런데. 누나는, 아니 교생 선생님은 그러니까 초록색 코트를 입은, 코트 왼쪽 깃에 빨간색 알파벳 B자를 단 아가씨는 웃었다. 그런데 혼자 있는 게 싫었구나?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

선생님의 방에서는 귤 냄새가 났다. 선생님은 귤 몇 개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내며 말했다. 크리스마스 캐럴 들을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선생님은 헤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방이 따뜻해서 나는 그만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학생, 일어나. 종점이야.” 누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텅 빈 버스에는 기사와 나 둘뿐이었다. “무슨 잠을 그렇게 자? 숙박비 받아야겠다.” 버스 라디오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탄전야였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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