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 포 르 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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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피카소」여,고맙네.자네는 그「이베리아」적인 무 질서하고도 전체적인 천재를 가지고 근대회화의 추악함을 죽여주었다.』
「달리」는 그의 유명한「곤비선언」을 이런 말로 맺었다.그러나「피카소」가 90평생 을 두고 다투어온 것은 근대회화의 추악함만이 아니라 사실은 현대문명 그 자체의 추악함이었다.
마치 불한당처럼 단숨에 2O세기 회화를 주름잡게 된 두 줄기 입체주의나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에 앞장선 게 「피카소」와 달리 였다.
「피카소」의 추상주의와 「함리」의 초현실주의는 이를테면 합리주의와 비 합리주의의 감극을 보여준 오늘의 육신 분열증적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만 「달리」와는 달러 「피카소」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차안에 머물러 있었다.그리고 기계문명,자본주의문명에의 반역과 이러한 문명이 차지하고 있는 주지주의적 바짝 마른 저압과 기묘한 병합을 보여준 게 「피카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쉴 사이 없이 변혁과 섭모를 꾀하였다. 그것은 감히 거대한 현대문명에의 반역을 외친 오늘의 「프로메데우스」나 다름 없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와 마찬가지로 평생동안 「피카소」를 사로잡고 있던 것은 인간에의 다시없는 관심이자 애착이었다.
가령 대작 「게르니카」 를 위한 엄청난 습작들에는 모두 슬픔의 심연 속에 잠긴 여자의 비통한 감정이 담겨져 있다. 이지러진 얼굴,튀어 나온 안구,가스를 쥐어 품는 듯한 손의 표석….
그것은 한 두 여인의 비극이 아니라,폭력적인 문명 속에 있는 오늘의 인간존재전체의 비극적 본질 생을 추구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가 짯모에 짯모를 거듭하고 쉴 사이 없이「데포르메지그」「의왈역=형식의 파애) 를 거듭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새로운「리얼리티」의 추구를 위한 것이었다.
후기에 접어 들면서부터 「피카소」는 곧잘「에로스」의 세계에 젖었다.
「피카소」에 있어서는 「에로티즘」은 조금도 음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남녀의 만남을 통해서 가장 순수하고 전체적인 인간상호간의 연대감을 찾으려 했던 것 뿐이다.
동시에 그것은 가장 깊은 생명의 원망을 담은 것이기도 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일종의 기억상실증에 빠지고있다.그런 인간의 고독과 절망감을 확인하기위해 「피카소」 는 「에로스」에 기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피카소」 는 이처럼 먼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콕토」의 무용극의 무대장치와의 상도 만들고,시인 「엘류알」과 함께 영남도 만든 「피카소」 는 현대 예술의 모든 분야에 변화를 주고,우리네 생활예술에 대한 기호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균형을 잃은 듯한「르코르뷔지애」건축의 기능 미, 대담한 색의 「넥타이」와 옷감의 무늬, 원시적 조형 미의 인형과 실내 장식물들,이상 야릇한 형태의 조각· 도자기·판색·절지 미술 등.이 모든 것에 걸쳐 그가 펄쳐준 「데포르메」적 미세계는 엄청나게 크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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