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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 전시의 문화인들(1)|육군 종군 작가단(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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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25초에 적 치하에서 온갖 고생을 겪은 문화인들은 1·4후퇴 때는 모두가 피난길에 올라 대구와 부산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작품활동의 광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우선 당장에 입에 풀칠하는 것부터가 막연하였다.
여기에 군정 훈국이 산파의 역할을 하여 각계 문화인들을 종횡으로 연결시켜 작품활동을 주선하고 어느 정도 생계유지도 도와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육군 종군 작가단을 비롯한 여러 종군 문화단체가 생겨 이들 나름대로 6·25전란에서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데 많은 정신적 기여를 했다.
사실 문학과 미술 음악 등 문화계의 각 분야는 건국 후 겨우 발아개화 하려는 참에 전쟁이 일어났었다.
예를 들면 국립극장은 개관 1년만에 사변을 맞이했고 대한민국 종합미술전(국전)도 2회 전시를 준비중이었는데 졸지에 6·25가 일어나 모두가 한꺼번에 시발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래서 문화인들은 재생의 활로를 종군에서 찾으며 몸부림쳤다.

<전후방 가교역…전쟁 측면지원>
즉 문인들은 종군 작가단을, 화가들은 종군 화가단을, 음악가들은 정훈 음악대나 합창단 등으로 각 군 정훈단실에 소속되어 총칼을 들고 전선에 직접 뛰어드는 대신 각자의 재질을 발휘하여 전쟁의 측면을 지원했다.
문화인들의 이 같은 종군단체 중에서도 종군 작가단과 화가단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작가단이나 화가단이 일선을 종군한 다음 후방에서 작품활동을 벌여 전후방을 연결시키는 가교의 역할을 했던 것 외에 직접 군정훈 업무에 참여하여 출판사업 등을 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먼저 각종 종군 문화체제의 탄생과정과 활동상황 개요를 관계자들로부터 대충 들어보겠다.
▲김윤성씨(시인·당시 창공구락부 회원·현 문인협회 상임이사·49) <6월26일 밤 문총 회장 고의동씨(고)와 모윤숙 여사는 정훈국의 전우로 중앙방송국에 나가 시민들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방송을 했는데 이 방송 도중 나와 공중인씨(고)는 위시를 낭독했어요. 26일에 이어 27일에도 문총 간부들은 명동입구 문예사 사무실에 모여「비상 국민 선전대」라는 것을 조직했으나 하오부터는 포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피난민들이 거리를 메우게되자 결국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아 별로 한 일도 없었어요.
이날 저녁때까지 남아있던 조지훈 서정주 이한준 서정태씨 등은 결국 제각기 흩어지는 도리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는 서정태씨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어요. 대전에 내려 와서 김송 이한준 박목월 당상 이정종 박화목 조훈파 임긍재 이원당씨 및 이숭녕 이오열씨 등과 함께「문총 구국대」라는 것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종군 작가단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지요. 종군 작가단이 정식으로 생긴 것은 1·4후퇴 후였지만 문총 구국대는 6·25초에 이미 종군 활동을 시작했으니까요.

<임긍재씨가 최초의 전상 문인>
대전에 있을 때 임긍재씨(고)는 한강변 전투에 종군했다가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에 후송되었습니다.
그후 문총 구국대는 대구를 중심으로 한 지방 문인들과 제휴하여 9·18 수복 때까지 3개월간 종군활동을 계속하다가 9·18수복과 더불어 일단 사명을 완료한 것으로 보고 자진해체했으나 문인들의 종군활동은 계속되었어요.
「유엔」군이 북진할 때 유치환 오영수 박용덕 홍승의씨 등은 원산 방면으로 동부전선에 나갔고, 최태응 조지훈 오영종 박화목씨 등은 평양방면으로 종군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중공군의 개입으로「유엔」군이 총 퇴각할 때 오영종 조지훈씨 등은 그 동안 평양에서 결성한「북한 문총」의 문인들과 함께 철수했어요.
이 때 많은 문화인들이 국군과 함께 월남했는데 조지훈씨의 공이 컸습니다.
작곡가 김동진씨를 비롯, 박남수 양명문 함윤수 장수철 김이석 강소천 원응서 박경종 한교석 이인석 김영삼씨 등이 이때 넘어 왔습니다.
1·4후퇴 후 대구·부산에 모인 문인들은 종군 작가단을 만들어 총칼대신「펜」으로 자유수호에 힘을 기울였지요. >
▲이선근씨(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준장·현 영남대총장·69) <50년6월28일 1차로 서울에서 철수할 때 수원에서 대전에 내려가 보니 문화인들이 많이 몰려왔는데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요. 또 이 때 공보처나 문교부의 기능이 마비되어 있던 때라 계엄사령부가 이 기능을 맡게되어 정훈국은 문화관계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어요.

<정훈국서 문인생활 안정 도와>
이렇게 해서 정훈국과 문화인들과의 관계가 맺어지기 시작했는데 우선 동가숙 서가식하는 문화인들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안정시키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정훈국의 예비비를 뜯어내 대전 시내의 하천 변에 간이 합숙소를 만들어주고 식량도 배급했어요.
하천 변에 모여 있던 문화인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만 이분들이 군과 인연을 맺어 단체활동을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이 무렵에 일선 종군이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정훈국의 업무중 대민 업무인 문화인들과의 일은 일찌기 한국역사 속에서는 물론 외국의 전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협조가 잘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물론 많은 문화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다보니 더러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문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는 높이 평가할만합니다.>
▲김기완씨(당시 공군 정훈감=대령·현 주일공사·47) <1·4후퇴 후 대구·부산에 많은 문화인들이 몰려들었으나 사실상 이들에게는 국가로부터 별다른 보호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단순한 피난민으로 고생이 많았어요. 따라서 이들 문화인들을 조직화해서 반공전쟁의 의의를 알리는 작품활동을 통해 당시의 민심을 순화하자는데 종군 작가단의 창설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처음에 이 같은 취지를 신성서 국방부 장관에게 품신했더니 신 장관은 전쟁 중에 민간인을 특정인 대우해서는 곤란하다면서 선뜻 찬성치 않았어요.
그래서 이선근 정훈국장과 상의하여 다시 신 장관께 문화인들의 단체활동에 관한 필요성을 누누이 실명하여 결국 승낙을 얻어 종군 작가단·화가단 등 종군문화인 단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들 종군단체 회원들에게는 군복과 휘장을 달아주고 소속된 각 정훈감실에서 신분증을 발행해주고 때로는 쌀이나 광목 같은 것도 나누어주어 조금이나마 살림에 보탬이 되도록 했어요.
대부분 직업이 없이 피난은 문화인들이라 군 정훈감실에 소속되어 신분을 보장받는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어서 당시의 문화인들은 거의 모두 등록되었습니다.>

<공군에도 창공구락부가 발족>
▲구상씨(전선 문학5호의 「종군작가 2년」에서 발췌) <6·25사변 전에도 민족진영의 문인들 몇몇이 38선을 시찰하거나 여순 반란사건 조사 등으로 출동했으나 이것은 개인자격으로 자발적이나 또는 군부의 위촉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인종군의 시초라면 동란직후 수원에 모였던 임긍재 조영암 김송 박연복 구상 등이 「종군문인」이라는 포목완장을 달았던 것이 효시일 것이다.
그리고 당시 1차로 영등포의 한강 대안접전에 참가했던 임긍재씨의 명예 부상이 종군문인의 최초의 전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대전으로 후퇴해서 다수 문우들의 집결을 보아 「문총 구국대」라는 정식 종군단체를 결성했고 이것은 9·28환도시까지 대적·대민·군정훈 공작에 협조하여 그 공적이 지대했다.
1·4후퇴 후 대구에서 정훈국 차장인 김기완 대령의 알선으로 10여명의 지명 작가들이 공군 문인단, 창공구락부의 정식발족을 보았고 뒤이어 51년5월26일에 육군 종군 작가단이 탄생했다.>
◆주요일지(1952년 l2월25∼28일)
※25일▲41대의 「미그」기, 서울접근 시도했으나 격퇴됨 ▲북한 당국자, 공산 각국으로부터 원조 증가하고 있다고 언명.
※26일 ▲거제도 수용소서 공산 포로1명 피살 ▲미 정계, 「스탈린」성명에 큰 관심.
※27일 ▲「아이크」, 백두진 총리서리에게 방한시의 환영을 감사 서한 ▲소련 육군기관지 적성, 북한 공산군의 방위선은 공고하다고 주장.
※28일 ▲미 공군기 2백대, 평양 일대 맹폭. ▲정부 대변인, 이 대통령이 명년1월 동경의「클라크」사령부 방문한다고 발표. ▲「맥아더」원수, 「트루먼」대통령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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