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의 공포 … 시장은 비관, 한은은 낙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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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수

“일본식 디플레 우려는 적절치 않다.” 18일 김중수(사진) 한국은행 총재가 작심한 듯 내놓은 발언이다. 민간 경제 전문가들과의 정례 간담회 자리에서다. 그는 “업계도 그렇고, 많은 국민이 혹시 일본처럼 디플레로 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의 얘기를 한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어 최근 경제지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붙였다. 성장률 회복 추세가 뚜렷하고, 물가도 외부 변수들을 빼고 보면 그리 낮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달에는 고용도 ‘깜짝 성장’(서프라이즈) 수준을 기록했다고 평가했다. 지표로 보면 디플레 우려는 그야말로 ‘기우’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붙는 ‘디플레 공포’ 논란의 진화에 적극 나선 셈이다.

 김 총재는 12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에도 낙관적인 경기 진단을 내놨다. 다만 오랜 저(低)성장을 탈피해 정상 궤도에 오르는 건 내년 하반기쯤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준금리를 움직일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를 근거로 금융권에선 한은이 상당히 긴 ‘동면’에 들어갈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그렇다고 디플레 논란까지 잠잠해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통화당국을 딜레마에 빠뜨릴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상당 기간 이어질 저물가, 지표와 동떨어진 체감 경기, 그리고 거세지는 원화 강세 압력이 그것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7개월째 한은 중기 목표치(2.5~3.5%)를 밑돌고 있고, 내년에도 2.0~2.5%에 머물 전망이다. 김 총재는 이날 “숫자가 하한에 있다는 건 사실이기 때문에 올 한 해 물가를 돌아보면서 내년에 대처할 시사점을 찾고 있다”고 고심의 일단을 내비쳤다. 지표와 체감 경기의 괴리에 대해선 “분배에 관한 문제일 수 있고, 내부에 다른 문제도 있을 수 있다”고 한 발 비켜 섰다.

 산업계를 중심으로 금리인하론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저물가·저성장으로 명분이 있는 데다 원화 강세의 압력을 낮추는 실리까지 챙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의 저금리 정책으로 한국과의 금리 차이가 확대되고, 양국의 물가 차이도 역전되면서 원화 절상 압력도 높아졌다”면서 “금리 인하를 포함한 완화적 통화정책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수익을 갉아먹는 저금리가 달갑지 않은 금융권에선 금리를 내려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보험연구원 윤성훈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가계와 기업이 부채를 줄이는 시기에는 금리가 0%라도 대출을 받지 않는다”면서 “기준금리를 낮추더라도 내수를 부양하는 효과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연구원은 한 발 더 나가 금리 인상 타이밍을 잡을 때라는 의견을 내놨다. 신용상 선임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금융위기 이후 금리를 내려도 오히려 저물가가 심화되는 등 금리와 물가 간의 관계가 불안정해졌다”면서 “적절한 시점에 인상을 통해 금리수준을 정상화하고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에선 한은의 ‘실기’가 금리 딜레마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용상 위원은 “저물가 기조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금리가 상당 기간 조정되지 않고 있다는 건 통화당국이 금리 조정 타이밍을 놓쳤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한은은 지난해 7월과 10월 두 차례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경기가 부진하자 추가로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지적이 이곳저곳에서 나왔다. 결국 올해 5월에 한 차례 더 내렸지만, 너무 늦었다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물가안정목표를 어떻게 할지도 통화당국이 안고 있는 딜레마다. 한국개발연구원(KDI)·금융연구원 등에서 목표치 하향을 검토해볼 때가 됐다는 얘기가 잇따라 나온다.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면서 물가상승률도 추세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인데 목표치는 20년 전과 큰 변화가 없어 괜한 혼선만 빚고 있다는 얘기다. 1990년대 5.4%였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이후 2000년대 들어 금융위기 전까지 3.2%, 금융위기 이후 현재까지는 2.6%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홍익대 전성인(경제학) 교수는 “목표치를 낮출 필요가 있다”면서 “근본적으로는 디플레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물가안정목표제가 유효한 수단인지 점검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은은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한은 관계자는 “목표치를 낮추자는 건 사실상 저물가·저성장을 공인하자는 의미”라면서 “물가 기대심리를 꺾어 저물가가 고착화되는 등 부작용도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조민근·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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