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705)<제자 박갑동>|내가 아는 박헌영(제 31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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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중 운동자 대회
이른바 사회주의 사상운동이 국내에 널리 전개되자 「코민테른」의 대한국 관계기관인 「꼬르뷰로」(고려국)는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안에 공산조직을 만들려고 광분했다.
1924년 들어 「꼬르뷰로」의 공작활동은 극한에 이르렀다.
이미 김재봉·신철등을 밀파한「꼬르뷰로」는 각 좌파단체를 충동해서 하루빨리 국내 공산당조직을 하도록 촉구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홍명희·김찬·홍증식 등에 의해 거도된 신사상연구회는 11월19일 화요회로 새로 이름을 개칭, 지상정책기관 같은 것을 만들었다. 화요회란 이름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의 생일이 화요일이었다 해서 딴 이름이었다. 같은 무렵인 11월25일 김야수계의 북성회도 북풍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박헌영의 소속은 굳이 따지자면 화요회「멤버」에 속해 활동했다. 화요회와 북풍회는 전회에서도 여러 차례 얘기한 것처럼 같은 좌파단체로 자매관계를 유지하며 대외적인 활동에는 늘 행동을 같이 하였다.
한편 같은 좌경「그룹」인 서울청년회도 지하공산조직인 서울당 또는 서울「콩그룹」을10월쯤에 만들었다. 이밖에 무산자동맹회(원우도) 조선노동연맹회(윤덕병) 도 각각 자파세력을 확장하며 지하조직을 서두른 때이었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공산주의자들은 국내공산당의 조직시기를 24년 후반기를 결정적인 시기로 잡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직세력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각종사회주의운동대회를 여기저기서 열었다.
또 각종대회개최는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공산당지하조직을 하기 위해 일경의 시선을 딴데 돌리고 치안력을 분산시키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하여튼 24년에서 25년 초반에 들어 국내에는 각종 운동자대회 간담회형식의 집회가 곳곳에서 많이 열렸다.
박헌영이 속해있던 화요회는1925년2월16일 각지의 이른바 민중운동자 7O여명을 망라하여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연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재경위원 2O여명으로 의사·심사·통신·서무의 4부를 설치하고 대회준비도 조직했다. 박헌영은 그때 조선일보지방부기자로 재직중인 때이었다. 박은 그의 처 주세죽과 함께 임원근 허정숙내외, 조봉암 김조이내외와 더불어 경성대표의 대회준비위원으로 뽑혔다.
경성대표준비위원으로는 홍덕유 민태흥 김찬 김재봉 김단야 박일병 권오설 윤덕병 구연흠 장지필 이석 등이 들었다. 지방준비위로 알만한 사람으로는 평양대표에 진병기, 대구 최원택, 신의주 임형관, 동래 백광흠, 진주 강달영, 전주 방응모, 안동 이준태 등도 뽑혀졌다. 준비위원은 모두 72명이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특히 화요회에서 앞장서 주최한 것은 실상은 화요회가 지하조직인「꾜르뷰로」 국내부의 지상정책기관으로 활약했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래서 화요회측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자면 압도적 다수파의 전선동일을 꾀하여야했기 때문에 대회를 연 것이다.
그때 대회의 취지문을 보면 「조선의 민중운동도 점차 발달하여 민중화하려한다. 그러나 종래 이 운동을 위한 회합은 부분적이었고 각방면을 망라한 전조선대회는 없었다.
그러므로 전조선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근본방침을 토의코자 사상·농민·노동·청년·형평·여성등 각 운동단체의 대표로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코자 하노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같은 무렵 열린 조선기자대회와 함께 공산당 조직을 만들기 위해 방패막이로 연 대회이었다 할 것이다.
1925년4월20일상오10시, 지금 서울 소공동상공회의소자리 공회당(당시는 장곡천정공회당이라 불렀음)에서 열기로 된 민중운동자대회는 대회전날인 19일 상오까지 전국에서 4백25개 단체가 참가신청을 해 대의원이 5백8명이나 되었고 지방에서 상경하는 대의원들로 시내의 여관은 북적거렸다.
그런데 19일밤 9시쯤 본정서 고등계에서 갑자기 준비위원이던 조봉암을 불러 『내일 아침에 개최될 대회는 상부의 명령으로 금지한다』고 금지통보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준비위원들은 낙원동대회준비위원회에서 논의 끝에 김연희·전일 등을 교섭대표로 경무국에 보냈으나 경무국 전중고등국장은 주최측이 경기도 경찰부에 낸 토의사항내용이 공산주의운동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대회를 금지한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그래서 간친회 형식으로나마 모임을 갖겠다고 했으나 경기도 검찰부 마야경무부장은 『간친회나 다과회일지라도 의견교환이 있는 회합이면 절대 금지한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대회날인 2O일아침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대의원3백여명이 회장에 나왔다가 준비위원들로부터 이 사실을 듣고 낙원동준비회 사무실에 모여들어 한때 교통이 막히기까지 했다.
해산당한 대의원들은 하오3시쯤 「파고다」공원에 모여들었으나 또 경찰에 쫓겨 거리로 몰려났다. 흥분한 대의원들은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이날 관철동 우미관 앞에서 시위를 지휘했던 당시 조선일보기자 서범석씨(건국회의원)말에 따르면 하오8시반부터 대의원들은 삼삼오오 단성사와 우미관 앞에 모였다.
하오9시픔 우미관 앞에 모였던 2백여명의 군중은『무리한 경관의 압박에 반항하자』라고 검은 글씨를 쓴 깃발 5개를 앞세우고 단성사 쪽으로 열을 지어 행진했다. 이들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자 밤거리의 수천 군중이 합세했고 단성사 쪽에선 조봉암이 시위군중을 이끌고 우미관쪽으로 향해 종로일대가 큰 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소위 「적기사건」이라는 것으로 서범석씨 등 15명은 이 사건 때문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6월 집행유예3년의 언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이 시위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이미 며칠전 조직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핵심으로서 조직에 열을 올리고 있었을 것이므로 시위에는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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