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의 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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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27 총선 결과는 야당 진영에 심각한 반성과 시련의 과제를 던졌다.
전통 야당을 자부했던 신민당은 약화된 국회 기능의 회복을 내걸고 최소한 3분의 1선의 의석 (73석)이 필요하다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했으나 이에 훨씬 미달하는 52석에 머물렀다.
그러나 신민당은 비록 8대 국회 때의 89석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금·조직상의 어려운 사정과 종래 선거 운동의 주무기였던 자유로운 유세가 제한된 새 선거 제도에도 불구하고 원내 제1야당의 자리를 굳혔다.
반면에 신민당에서 떨어져 나간 통일당은 총선 기간 중 선명 야당을 자처하면서 신민당을 공격했지만 단 2석이라는 조락을 면치 못했다.
이런 총선 결과는 국민들이 내실 없는 야당과 야당 전열의 분산을 원치 않는다는 「말없는 의사」의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민들은 지난 8대째 호헌선의 확보조차도 어렵다고 판단했던 신민당에 예상외로 3분의 1이 훨씬 넘는 89석을 몰아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야당 지지라기보다는 의회 기능의 정상화를 통해 민주 헌정을 펴나가라는 채찍질이었다고 풀이됐던 것이다.
그러나 신민당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 채 국회 해산을 맞았다.
야당은 비록 내외부의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성선을 불과 한달 정도 앞두고 신민당과 통일당으로 분열되는 적전 내란을 일으키고 말았었다. 더구나 총선 운동 기간 중에는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는 선명 논쟁만 하는 통에 여당과는 제대로 대결하지 못한 인상을 주었다.
물론 중선거구로 바뀐 새 선거 제도는 도시 표에만 의존하다시피한 야당에 불리한 요건이 된것도 사실이다.
『사태는 심각하다』-. 신민당의 정일형 당수 권한 대행은 27일 밤 서울 등 대도시의 개표 진행 상황을 둘러보고 이같이 말했다.
정 대행의 이 말은 듣기에도 착잡하다. 지금의 야당 사정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야당은 스스로를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전열을 하나로 가다듬어야 할 것이 불가피 하게됐다.
그러나 서로 비난을 하며 갈라섰던 신민당과 통일당이 그리 쉽사리 화합될 것 같지는 않다.
신민당은 9대 국회가 개원되면 곧 당수 대행이라는 과도 체제를 벗고 당권을 재정비할 계획이다.
총선을 앞두고 정일형씨를 당수 대행으로 지명하고 당수직을 사퇴했던 유진산씨는 그동안 그가 짜놓은 당 체제로 보아 당수직에 복귀하려고 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유씨는 당수직 사퇴에 앞서 자신의 손으로 모든 당직자를 임명했고 다음 전당 대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중앙상무위원 전형 위원과 이와 관련한 당헌 심사 위원 등을 자파 사람으로 짜놓았다.
이같은 사실들은 신민당이 앞으로 다시 진산 체제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앞으로 신민당의 모든 당내외 활동은 진산계에 의해 좌우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럴 경우 비주류 측이나 유씨에게 비판적인 고흥문-김영삼계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와 진산계가 이들을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가 주목거리다.
신민당 안에는 벌써부터 총선 결과를 놓고 이견이 생기고 있다.
정일형 당수 대행은 『승복 여부를 심각히 검토해야할 것이며 2·27 총선은 무효화돼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철승씨는 『그럴 단계는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신민당은 우선 이 문제를 먼저 처리한 뒤 당의 진로를 잡을 것이지만 그 처리 결과와 당내 각파의 화회 여부가 당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그런 연후에 통일당 등 기타 야당 세력과의 관계 조정이 진행될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당은 예상과는 달리 양일동 대표 최고위원과 김홍일 상임 고문, 그리고 윤제술 박병배 장준하 김선태씨 등 당 수뇌급은 물론 57명의 후보자를 통틀어 단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 당의 존립 기반이 흔들렸다.
양일동 대표는 『2·27총선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원외에서나마 단계적인 투쟁을 벌이겠다』고 했지만 현재로선 당의 존립마저 어둡다. <허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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