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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비의 제간제 토론|신문협회 한국사 연구위 제5차「세미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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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 신문 협회 주관 한국사 연구위원회의 제5차 고대사「세미나」가 14일 신문 회관회의실에서 열렸다. 지난번에 이어「광개토왕릉비의 문제」를 다시 주제로 한 이날 모임에는 천관우(사학자)김정학(부산대)이기백(서강대)김원룡(서울대문리대)이용범(동국대)김정배(고려대)임창순 씨 등이 참가, 토론을 벌였다.
천관우 씨가 비문의 대 왜 작전기사보다 대료하작전기사를 중시,「십칠년 정미」조를 이것으로 본데 대해 이용범씨는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부가했다.
곧 이 비문의「환파사구성루성」은 사비성·안성의 잘못으로, 이는 요동반도 대련 일대를 지칭한 것으로 본 것. 사비성은「자치통감」에 나오는 사비성이며, 안성은 곧 안시성을 말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진희 자료 중의. 영희 본도「사비성·안성」으로 표기하고 있는 점은 자기 설을 입증한다고 주장 한 것이다.
더우기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노로 사비성이 첫 경로가 되는 만큼 광개토왕이 요하를 거쳐 다시 돌아와 요동정벌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기백·김원룡 씨도「십칠년 정미」조가 요동·요하 등 중국군과 맞닥뜨린 전투를 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데 찬동했다.
또「감년경수」도 동부여 정벌에 관해서 천씨가「동부여」를 장춘·농안 방면으로 본데 대해 이용범씨는 계루부의 근거였던 두만강 유역 간도지역으로 봤다.
고구려 5족 중 계루부는 노를 쓰는 다른 부족과는 다튼 부족으로 철을 쓸 줄 알고 이들이 간도를 근거로 했었으며 뒤에 고구려의 중심 세력이 돼 고지를 소흘히 했다가 다시 이를 회복한 사건으로 봤다.
김원룡씨는 이에 관련해 농안과 간도사이가 보통 생각하듯 그리 먼 것이 아니고 고고학적 유물들도 이들 두 곳에 몰려 있기 때문에 두 주장이 심히 다른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한편 이기백 씨는 왕비에서 전쟁 기사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수묘인연호」이후의 긴 기록들이 당시의 가족제도·호구조사·국민파악 방법 면에서 중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연과 간연이 1대1백의 비율을 이룬 것이나 성과 촌의 크기 등이 어느 정도였는가 연구돼야겠다고 했다.
또 연약하고 쓸모 없다고 본「구민」과 왕권을 지키는데 좋은 편으로 기술 된「신민」문제도 연구 될 문제라는 것이다. 또 광개토대왕의 출생 년·즉위 년·사망 년이『삼국사기』와 비문이 다른 것도 지적됐다.
사기에는 392년에 즉위해서 414년에 사망한 것으로 돼있으나 능 비로는 신란391년 즉위, 412년(영악 22 년)사망으로 된 것도 연구 과제라고 이기백 씨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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