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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의 현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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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가톨릭」의 「미사」에 쿵작 쿵작 하는 「재즈」음악이 등장한 것은 1962년이다. 미국의 한 성당에서 성가 대신에 「로크」 음악을 연주했었다. 그 「미사」는 결코 무효로 선언되지는 않았다.
정중과 희열과 찬성을 느끼며 하느님을 찬미 할 수 있는 노래라면 굳이 「성가」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하자면 「재즈·미사」의 발상은 이런 것이다. 더구나 그런 느낌을 주는 「멜러디」는 풍토와 생활 전통과 역사에 따라 엄연히 다르다. 따라서 「유럽」의 문화와 전통에서 우러나온 「멜러디」에 세계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감정을 몰입하기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이런 생각은 「바티칸」 제2공 의회에서 비로소 공식화하였다. 이른바 교회 현대화의 한 과제로 채택된 것이다.
반대 의견도 없지 않다. 술을 마시며 장단을 맞추던 가락 따위를 어떻게 성스러운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 또 신앙의 토착화나 전통이란 그까짓 노랫가락으로 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오늘날과 같이 세상 만사가 세속화하고 격렬히 변화하는 속에서 교회까지 그 성스럽고 청결함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성가」란 「그레고리언·찬트」 (Gregorian Chant), 혹은 「라틴」어로 「상투스·그레고리아누스」 (Contus Gregorianus)라고 한다.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에 의해 7, 8세기 께에 성가가 확립되었다. 그 본질은 종교적인 것도 교회적인 것도 아니며, 다만 「전례」음악으로 주관적인 요소나 감정, 정서적인 느낌이 별로 없다.
가사는 「라틴」어. 그 기원은 지중해 문화권의 음악문화에서 찾고 있다. 이런 성가가 「아프리카」의 오지에서나, 극동의 일우, 어느 산촌에서 반드시 공감을 불러일으킬지는 의문이다.
사실 「필리핀」의 「마세다」와 같은 현대 작곡가는 그 나라 원주민 「타갈로그」의 토속 악기에 맞는 성가를 따로 작곡한 일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그들의 생활 감정에 더 호소되는 「샹송」으로 성가를 대신한 일이 있다. 「젤리노」라는 신부는 성경의 시편을 불어로 번역, 「멜러디」에 담아 개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웃 일본에서도 「스펌」신부가 「바이블·송」을 작곡, 성가의 대중화를 시도했다. 「미사」의 전례곡은 아니지만 미국의 저명한 지휘자 「R·번스틴」도 『무용과 음악과 극본을 위한 「미사」곡』을 작곡했다.
이런 창조적인 노력들은 오늘의 교회를 초월의 경지에서 인간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는 구름 위에 높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이웃에, 아니 인간의 피 속에 있다는 현실적인 생각이다.
서울의 어느 성당에서 구상하는 『성가의 현대화』도 그런 뜻에서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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