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국 문화의 이식|일본 관동 지방의 두 고분|일 국학원 대학 고고학 「팀」의 조사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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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경=박동순 특파원】동경의 북·서·서남부 일대의 방대한 「무사시노」 (무장야) 평야는 고대 한반도 이주민 (소위 귀화인)들의 정착지로 알려져 있다. 일본 국학원 대학 고고학 「팀」은 특히 이 「무사시노」 지역의 발굴 조사에 주력, 재작년에는 마견 고분 (천기시 고진구 마견)을 발굴했고 작년엔 기마 인물 벽화가 있는 조야 고분을 발굴한 바 있는데 최근 사진과 합께 도래인의 관련성을 밝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끌고 있다.
마견 고분은 「무사시노」 일대에서도 특히 많은 고분군이 산재하는 「다마까와」(다마천) 유역의 하류 변에 위치해 있으며 분구는 직경 약 30m 높이 약 3m의 원분. 이 조사 「팀」은 재작년 2월의 고분 발굴로 선문, 2개의 부실 및 주실로 구성된 거대한 석실을 찾아냈었다. 이번에 밝힌 자료에 따르면 석실의 규모는 「아치」형 천장의 주실이 길이·폭·높이 각 3m .부실은 조금 작으나 축조 수법 등 일본에서는 A급 석실로 평가되고 있다.
석실 내벽은 곱게 다듬어 석회가 칠해져 있으며 그 위에 장식 무늬를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으나 부장품은 모두 도굴되어 없다.
그러나 조사를 지도했던 「히꾸찌」 (비구청지) 교수는 ⓛ돌을 다듬고 잘라서 쓴 점 (절석 축조) ②석실 천장이 2개의 돌로 이루어졌다는 등의 거석 사용 수법 ③「아치」형 축조법과 ④석회를 사용하고 장식 무늬를 그린 듯한 점으로 미루어 한반도 문화, 특히 고구려 고분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있고, 7세기 후반∼8세기께로 추정되는 이 고분 축조에는 당시 이 지역에 정착한 도래인이 참여한 것이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고분의 주인공 역시 도래인 집단의 지도자일 가능성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대규모 고분 축조가 제한된 이 시기에 이렇듯 거대한 석실로 만든 점으로 미루어 피장자가 절대 권력자였다는 것이다.
이 조사 「팀」은 또 작년 7윌, 마견 고분 근처의 또 다른 횡혈식 고분 (조야 고분)을 발굴, 기마인상이 그려진 벽화를 찾아냈다.
이 선각 벽화는 2명의 인물과 5마리의 말이 나란히 그려져 있으며 그중 하나는 기마임이 분명하다.
흔히 『나량·평안 시대의 「무사시노」 역사를 훑어보면 흡사 한국사를 읽는 느낌이 든다』고 할만큼 이 지역은 이주한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파마풍토기」 「속일본기」를 비롯, 일본의 숱한 고문헌에는 고구려·신라·백제인의 이주 기록이 있고 이들에 의해 「고려군」이 설치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이주민들은 무사를 비롯, 승려와 의술·복서·철공·혁공·화사·약사·직공 등의 다양한 기술자로 구성됐고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 숱한 문화 및 산업 기술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선 마견 고분의 지명만 하더라도 근처의 조포시 등과 함께 말과 명주라는 이주민과의 관계를 뚜렷이 밝혀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일대에 산재하는 사찰과 신사, 그리고 지금껏 전해진 「무장등」이라는 말안장 제조 기술, 양잠술 등은 한결같이 이주민의 유산이라고 지적된다.
심지어는 유망한 「무장 무사」라는 무사 집단도 이주민의 후손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그러기 때문에 비기일삼랑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해서 이주민은 시대의 경과와 함께 일본인과 일체가 되고 현재 일본인의 조상이 되고도 있다』고 맺고 있다.
그런 점에서 수염 기른 기마인상, 다섯 마리의 말 그림, 금 귀고리, 대규모 석실 등을 찾아낸 국학원 대조사 「팀」의 성과는 고대의 한·일 관계를 밝히는 새로운 유력한 자료로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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