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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군수보급(1)|지원작전(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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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화력·기동력·통신은 현대 국지전의 승패를 판가름하는 3대요소라고 볼 수 있겠다. 병기·탄약 등의 화력과 수송·유류·정비 등의 기동력, 유무선의 통신은 모두가 군수보급기능에 속하는 지원작전이다.
이 같은 제반 군수물자를 확보, 소요되는 시기와 장소에 정확히 보급해주느냐의 문제, 즉 군수지원의 원활 여부는 일선 전투의 승부를 좌우하는 것이다.
6·25발발 당시로 볼때 우리 한국군은 전쟁수행에 있어 이같이 중요한 군수지원문제가 물자확보나 체제 면에서 다음 네 가지 경우처럼 거의 「제로」상태였다.
▲『6월27일 ??덕 참모총장이 부르 길래 들어갔더니 편지 한 통과 보증수표 몇 장을 주면서 조선맥주회사로 나가 맥주를 사서 봉일천 1사단장 백선엽 대령에게 갖다주라는 거예요.
편지내용은『최 중위 편에 보낸 맥주를 장병들에게 마시게 하고 그 병에 휘발유를 넣어 적「탱크」를 부수라』는 명령입디다.

<닥치는 대로 각종 차량을 징발>
나는 27일 저녁 대차에 싣고 간 맥주를 일산 1사단 집적 소에서 사단군수참모인 박경원 중령한테 편지와 같이 인계해 주고 돌아왔어요.』(최순언씨 증언=당시 육군 병참 단 근무· 중위·현 녹십자사전무·45)
▲『1951년 4월 부산부두에 들어와 있는 야포를 일선으로 끌어올릴「지프」가 없어 야단 났었어요.
나는 민간소유「지프」를 징발키 위해 대구육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 모자에 중사계급장을 달고 역 앞에서 교통순경과 함께 통과하는「지프」들을 모두 잡았습니다. 혹간 반항하는 운전사나 차주가 있으면 구석으로 데리고 가 내 모자 속에 단 대령 계급장을 보이면서 호통을 쳤더니 벌벌 떨고 복종합디다.
나는 운전사까지 통째로 징발한 차들을 부두로 끌고 가 포를 달아서 전방으로 올려보냈습니다.
뒤이어 들어온 포들을 끌「지프」를 조달키 위해 또 부산으로 내려가 이번에는 민간인 승용차들을 징발해 다가 육본 안의 고급장교용「지프」와 대체해 사용했어요.
나는 정일권 참모총장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계획을 보고하고 민간인 승용 차량 징발에 대한「특명」을 얻어냈습니다. 이것은 차주들이 압력을 넣어 징발한 차량들을 다시 빼 내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 대통령께 징발에서의 예외로 해야할 차량을 적어달라고 했더니「메모」지에 김활란 이기봉 두 사람 이름을 쓰면서 이 사람들은 시킨 일이 있으니 차가 꼭 필요할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우선 전쟁을 이기고 봐야될게 아니냐 면서 여타의 차들은 지위의 고하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징발해도 좋다고 하데요.
징발한 승용차 50여대를 대구로 끌고 올라와 육본 안의 군용「지프」와 대체하는데도 애를 좀 먹었습니다.
고급 장교들이 잘 응하지 않아 다투기도 많이 했는데 하여튼 김창룡 CIC대장「지프」까지 뺏어냈었지요.』(이치업씨 증언=당시 육본 수송 감·대령·현 도로공사 감사·52).
▲『심할 때는 하루에 1천여 명씩…매일같이 수백 명의 부상병들이 각 육군병원으로 후송돼왔습니다.
1·4후퇴와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전후해 일선전투가 피아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백열 화하자 수용능력 5백여명 밖에 안 되는 부산 제5육군병원에서는 한때 5만여명의 부상자를 수용했었어요.

<숙영 시설 나빠 훈병 죽어가고>
병동과 인근 국민학교를 다 써도 안돼 환자들을 바람받이 어시장에다 가마니를 깔고 수용 (?)했습니다. 군의관과 위생병의 절대수가 모자라고 적절한 간호를 못해주어 귀중한 생명을 잃고만 부상병들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51년 말 제주 육군 제1훈련소에서 매일 같이 훈병들이 10여명씩 죽어 나간다고 말썽이 일어나 의무감인 나와 유흥수 감찰감이 진상조사에 나섰습니다.
사회에서는 이 문제를「제2의 국민방위군사건」이라고 까지 몰아붙이는 지경이었어요.
사실 일선지휘관들도 제주훈련소를 거쳐온 신병들을 보충 받고는 왜 환자들만 보내느냐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요.
이종찬 참모총장은 사태가 이렇게 되자 검열 반을 편성, 조사를 해오도록 명합디다. 20일간의 조사결과는 ①음료수가 부족하고 ②급식이 형편없으며 ③숙영 시설이 엉망이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제주 모슬포 훈련소에 입소한 일부 장정들이 이 같은 원인으로 인공탈수현상이 일어나고 바람에 날려 들어간 흙먼지를 그냥 비벼대 눈에 결막염을 앓고 있더군요.
특히 숙영은 훈련병들이 통나무를 베어다 풀잎으로 하늘만 가려놓은 막사에서 잠을 자는 형편이에요. 잠자리는 막사 가운데의 통로 양쪽에 흙을 돋운 둔덕을 풀로 덮고 그 위에서 모포 몇 장을 가지고 자는데 밑의 풀이 썩어「류머티즘」에 걸릴 위험이 많더군요.
이 같은 상황이니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환자가 될 수밖에 없습디다.
나는 미 고문관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강평을 통해 백인엽 훈련소장에게 조사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대구로 돌아와서는 이에 대한 육본의 책임을 신랄히 지적했습니다.
유재흥 참모차장은 현역군인으로서 육본의 과오를 그같이 지적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합디다.
이종찬 총장은 보고를 듣고 나더니 즉각「트럭」20대와 빈「드럼」통 5백여 개를 LST편으로 보내 훈련소의 급수사정을 개선토록 지시하더군요.』(윤치왕씨 증언=당시 육본 의무감·준장·현 부평 윤 산부인과 개업·78).
▲『1·4후퇴 후 부산 광안리에 창설된 육군 제7피복 창에는 서울서 피난 온 미모의 여대생들이 호구지책으로 재봉틀을 돌리며 봉제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기간요원으로 근무하던 국민학교 밖에 안나온 한 육군중사는 창에 근무하는 서울 모 여대생과 연애 끝에 결혼까지「골·인」을 했지요. 당시 여대생들 사이에 군인의 인기는 대단 했었습니다.

<여대생들 군 봉제공장서 일해>
학력 때문에 부인에게 늘 열등감을 느껴오던 그 중사는 하루 거나하게 취해 가지고 귀가, 잠을 자다가 새벽 일찍 취기가 서린 채 눈을 떴어요.
날계란 생각이 난 남편은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고있는 부인을 불러들여「오므」좀 하나만 사다달라고 했대요.
계란을 유식하게 영어로 말한다는 게「데이트」시절 부인과 함께 양식집서 즐겨먹던「오므라이스」를 생각,「라이스」를 빼고「오므」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돈을 들고 부지런히 문밖을 나가던 부인은「오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어 다시 들어와 남편에게 물어봤대요.
남편은 정색을 하고「거·오므 있잖아」하면서 대학교를 다니고 그것 모르느냐고 핀잔을 했답디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던 부인이 되묻자「당신 헛 공부를 했군!」하면서「계란을 영어로「오므」라고 하잖아」하더라는 거예요.
그제야 부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계란을 사러나갔답디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 같은 이일화는 당시 부산에 있던 병참 부대에 널리 퍼져「오므」란 말이 한 때 유행을 했었습니다.』(김지관씨 증언=당시 부산 제279병참 단 세탁중대소대장·중위·현 참우회 간사·45).

<미군군수물자를 공수로 충당>
지원작전을 수행해야할 아군의 병기·병참·공병·용신·의무·수송 등의 각 기술병과가 적과 비교해볼 때 엄청나게 소홀했지만 미군의 신속한 군수물자의 공수로 초기의 부족을 충당해 나갔다.
솔직히 말해 미군을 비롯한 우방「유엔」참전국들의 지원 없이 우리 단독의 예산으로 군수물자를 조달, 6·25전쟁을 수행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쟁3년 동안 소모한 2백60만t으로 추정되는 각종 포탄 만해도 우리 한국에서 자체생산 했던 것은 한발도 없었고 모두가 미군 원조로 완성품을 들여다 썼던 것이다.
전쟁중의 미군군수물자지원은 정식으로 미국의회를 통과한 군원 법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미군군사비에서 그대로 미군 사용 분을 한국에 지원해준 것이었다.
미 군원 법에 의한 정식 원조는 휴전 후부터였다.
군수지원작전을 시기적으로 대별한다면 전쟁전반은 소모에 대한 물자보급과 병력확장에 따른 군수지원이 주였고 후반에야 보급기지창·경비 창 등을 창설, 군수체제를 확립하고 미식 기능별보급지원작전을 제대로 수행했다.

<주요일지> (1952년 10월3∼6일)
※3일▲일부 해병대와 상이군인 충돌사건 ▲영국최초의 원폭실험 ▲소련,「케넌」주소미대사의 소유 율 미국에 요구
※4일▲「미그」기2대 격추·5대 파괴 ▲「미그」기 원산남방서 미 함재기 1대 격추
※5일▲포로로 오인 수용한 1만1천명의 민간인 석방 ▲휴전회담의 공산 측 장교, 미 공군이 중립지대 침범했다고 비난 ▲「놀랜드」상원의부, 소련과의 단교 요구
※6일▲공산군대규모공세 ▲이 대통령, 장택상 총리해임▲「파르크」전 애급 왕 결석재판 ◆중앙일보에 3백76회까지 게재된「민족의 유언」을 을유문화사에서 4권의 책에 수록, 발행하여 지난 1윌5일부터 시판하고 있습니다. 가격은 합계 6천원. 이에 관한 문의나 연락은 을유문화사로 전화는(73)8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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