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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제30화>서북청년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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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첫대결 목동공방>
적지에 뛰어든 서청의 작용에 대한 좌익의 반작용은 너무나 빠르고 컸다.
남선파견대가 대전에 내려가 한달이 될까 말까 했을때(2월중순) 총력을 요구하는 첫공방전 「목동다리사건」을 맞아야했다. 이쪽은 임일대표를 비롯, 말단대원까지 총동원을해도 2백명에 불과한데 저쪽은 무려 5∼6백명. 「홈·그라운드」의 장점을 안고 서청이 발도 못붙이게 첫싹부터 짓뭉게버리자는 무서운 인해작전이었다.
남선파견대는 그때 자체 조직만 해놓고 생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있었다. 처음 내려간 60여명의 대원들은 살림살이가 채 꾸려지지 않아 여전히 독촉국민회·한독당·노총·청년연맹지부의 간부들집에 몇명씩 얹혀지내는 신세.
임일대표등 간부들은 당시의 도지사 우덕순씨, 시장 이석기씨(민주당때 국회의원). 경찰청장강실형씨등을 졸라 중동적산2층 요릿집을 임시합숙소로 얻고, 피난민 구호미를 교섭하는한편 월동용 담요를 얻기위해 대전여단장(충남·북관할), 원용덕대령(작고」과 국방경비대대장(대전지방고관할), 최덕신소령(현천도교령)등을 찾기에도 바빴다.
반면 대원들은 서울에서 자꾸 내려와 그때 벌써 2백명을 돌파하는등 늘어가기만 했다.
목동사건은 이처럼 전열을 못가다듬고 있는 남선파견대의 헛점을 찌른 기습이었다.
발단은 합숙소를 구하러 나간 우리 서청대원 6, 7명이 좌익촌 목동다리에서 몽둥이로 습격을 받은것.
이들은 당시 비어있던 일광사(중동·4백명수용가능)의 주지 양정묵스님을 만나 절을 빌리는 교섭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워낙 갑작스런 선제공격이어서 대원들은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으며 그중 철원출신대원(성명미상·당시22세)은 코가 비뚤어지는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두서가 없던 때라 힘깨나 쓰는 6, 7명의 대원을 찍히는대로 골라 즉각 내보내 봤지만 보복은 커녕 또다시 늘씬하게 얻어맞기만하고 돌아왔다.
시골 좌익이라고 방심하고 있다가 보기좋게 선수를 당한 꼴이었다.
남선일대의 좌익을 소탕한다는 거창한 구호아래 첫발을 내디딘 파견대 총본부가 재구실을 해보기도 전에 2연패부터 기록한 것은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남선파견대는 마침내 본때를 보여주지않을 수 없었다.
이날밤 목동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대치한 대전천양둑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살기마저 번득였다.
이쪽은 1백여명의 대원들이 저마다 다듬이 방망이 1개씩을 가슴에 품었고 인해전술에 대지, 권총 한자루, 수류탄 7발까지 준비하는등 어마어마한 무장. 수류탄은 허태화(함북길주)훈련부장이 그날낮 국방경비대에서 얻어왔고 권총은 철원출신 모대원(성명미상)이 소지해 있던 것으로 임일대표가 이날 찼다.
특히 이쪽대원들은 이날밤의 야습에 대비, 미리 패를 나눠 목동일대의 지형을 샅샅이 익혀놓고 있었다.
한편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먼저 습격해 오려고 계획했던지 5, 6백명이 둑이 하얗게 몰려 불을 치켜들고 함성을 올리고 있었다. 우선 숫적으로 1대5의 우세. 대전시뿐만아니라 인근 대덕군에서까지 동원된 조선민주청년동맹·전평·전국농민조합총연맹 전위부대들이었다. 그들도 저마다 몽둥이 l개씩을 들고 있었다.
처음 석전으로 불이붙고 싸움은 서로 다리와 내사이를 밀고 밀리며 치열한 육박전으로 번졌다. 무자비한 몽둥이에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튀는 일대결전. 그러나 목숨을 걸고 내려온 서청도 엄청난 병력의 우세앞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힘의균형은 어느새 깨지고 다리 위인 좌익들로 새까맣게 매워지기 시작했다. 궁지에 쫓기는 위기일발의 순간, 마침내 최후의 무기가 사용됐다.
임일대표의 권총이 불을뿜고 수류탄7발이 모조리 투척됐다.
이 수류탄 투척으로 사태는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이날 싸움으로 좌익의 사상자는 알수가 없으나(원래 발표않음) 서청측은 30여명이 부상, 시립병원에서 대소치료를 받았다.
한편 남선파견대가 출발을 하면서 선수를 당하고만있을수는 없는일.
남선파견대는 이날도 행동을개시, 당시 충남도광무국장 윤성순씨(뒤에 교통장관 역임·작고)에게 첫 화를 입혔다.
이를 요청해온 이는 당시 학무국장(성명미상)과 대전지방에 있었던 우익 종낭도측이었다. 당시 윤씨는 성분이 분명치 않게 생각돼 『우물우물 하는것도 결코 용납안된다』는 것을 「모델·케이스」로 보여주기위해 「타기트」로 삼은 것이다.
이에는 남선파견대 훈련부원김승호동지(황해도)의 11명과 우익단체 종낭도측 남기원씨외6, 7명이 같이 윤씨집을 찾아가 손님처럼 꾸민뒤 멋도 모르고 대문을 따는 그에게 무조건 다듬이 방망이와 몽둥이세례를 안겼다.
이 사건은 당사자가 현직 고관이어서 문제화돼 미처 몸을 못피한 종낭도측 남기원씨등은 모두 잡혀 징역1년, 집행유예3년, 벌금1천5백원씩을 각각 선고받는등 후유증이 따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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