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제30화 서북청년회(18)3·l절의 유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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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행동하는 서청을 출범부터 피바다로 장식하려던 우리의 모든 계획은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당초계획은 평준의 3·1절 기념식에만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서울을 비롯, 인천·대전 등 이남의 각 도청소재지에서 따로 열리는 좌익계 기념식마다 모조리 수류탄세례를 안기자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평준 일처럼 이남에서의 계획 또한 추진과정에서 불발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서청이 총진군의 기치를 세운 날(3·1절)무차별 살상의 결의와는 달리 표면상별일 없은 것처럼 된 것은 이처럼 모든 거사가 빗나갔기 때문이다.
각도 좌익계 기념식에 대한 전면공격 계획이 불발된 것은 돈암장(이박사)의 만류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 박사를 찾은 것(46년11월)은 거사자금을 꾸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이미 부장급이상의 극비간부회의에서 전국적인 거사계획을 최종 매듭짓고 수류탄 확보 등 준비작업 착수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계획은 『수류탄을 대량 제조, 각도지부별로 일제히 투척하되 남선 파견 대 총본부가 설치될 대전 등은 자체적으로, 그때까지 가부가 발족 안 되는 곳(준비위단계)은 중앙본부에서 40∼50명의 특공대를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수류탄제조비용과 동원경비였다.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때 우리가 잡은 총 경비는 50여 만원. 우리 힘만으로는 도저히 조달할 수 없는 엄청난 경비였다.
그래서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 박사를 찾았던 것이다.
간 사람은 나와 반성환 훈련부장 단 둘이었다. 나는 그때 이박사의 민 통일을 보고 있었고 서울엔 중앙집행위원으로만 머물러 거사계획을 주도할 위치는 아니었으나 돈암장을 무상 출입하는 관계로 이 일을 맡았다.
계획은 내가 설명하고 반동지가 보충설명을 한 뒤 일금50만원을 데 달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박사의 말씀은 뜻밖이었다.
『…지금 젊은 피를 흘릴 때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국가·민족을 위해 들고 일어설 때가 있을 터이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만류였다. 돈에 대해선 가부 말씀조차 없었다.
좋아할 줄 알고 찾아갔다가 퇴짜를 맞은 우리들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금 없는 대규모 특공거사란 있을 수 없는 것. 죽은 김성왕 사업부장과 반성환 동지 등이 발론, 치밀하게 짜왔던 핏빛 첫 작전은 이렇게돼 중지되고 시발부터 무서운 용맹을 떨쳐보려던 우리의 야심 또한 일단 꺾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만인 앞에 결사의 용맹을 선보이려던 서서의 집념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3·1절 당일 서울운동장에서 기념식을 가진 우리 우익세력이 가두 행진에 들어가 남대문에 이를 순간 좌익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온 사건이 뜻밖에도 터졌다. 서울역∼동대문∼종로∼광화문∼시청 앞을 거쳐 선두 이철승씨(전 국회의원)의 전국학생 총련맹이 남대문 전차종점을 통과하고 뒤따르던 서청이 막 도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오른쪽 남로당(현 자남 「빌딩」앞자리)과 왼쪽남대문 「빌딩」4층 옥상에서 총소리가 나면서 콩볶듯 탄환이 날아들었다.
이 직전 남산 신궁 앞(현안중근동상자리)에서 별도의 식을 가지고 남대문으로 밀려내려 오던 좌익청년들이 돌팔매질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에 신경을 쓰다가 난데없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타기트」는 서청 임이 틀림없었다. 엉뚱한 학련 후미의 중학생(성명미상·사망)등 10여명이 쓰러지고 시위 「대열」은 물살이 갈리듯 순식간에 갈라지며 뿔뿔이 흩어졌다.
위기일발. 나는 현「KOTRA」골목으로 뛰고 선우기성 위원장과 반성환 동지는 전차 밑으로 기어드는 등 서청 대열도 풍비박산이 났다.
20여분이 지났을까 무장경찰이 출동, 총격전 끝에 총성은 완전히 멎었지만 주위는 초연이 자욱한 채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그 많던 대열은 그림자도 없고 현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곧 무슨 일이 다시 벌어질 듯한 숨막힌 상태-.
이때 전차 밑에서 벌떡 일어나며 『서청은 모여라!』라고 고요를 찢는 이가 나타났다. 바로 반성환 동지였다.
그 순간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우리 서청 대원 5백 여명 전원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시민들도 그제 서야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서청 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대오를 새로 짜 행진곡 『우리는 서북청년 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를 소리높이 부르며 끝까지 가두시위를 계속했다 (해산장소 서대문 「로터리」).
유일한 행진재개였다. 연도의 시민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준 것은 물론-.
총탄도 결코 서청을 침묵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록 수루탄 세례를 먼저 퍼붓지 못하고 거꾸로 피습을 당했지만 이날의 행진은 서울시민에게 서책의 용맹성을 유감 없이 보여준 것이었다.
반 동지는 3일 김성왕, 그의 사촌 형 김재주 동지와 함께 강태학(둔노지부)등 행동대원을 2「트럭」가득 남로당본부로 이끌고 가 대기시켜 놓고 단신좌익의 소골에 뛰어들어 담판,『총격 범 색출과 공개사과』약속을 받아내는 등 끝까지 용맹을 보였다(남로당은 그 뒤 이 약속을 안 지켰음).
한편 선우기성 동지는 그 날 보인 서청의 용맹으로 3일 장석상 수도청장에게 불려가 『수고했다』는 격려와 함께 봉투1개(5만원·당시 쌀1가마 1천 원정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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