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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엄마 사이에서 방황하던 '대물림 미혼모' 국가는 어디에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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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을 꼽자면 딱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남의 머리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는 일. 다른 하나는 남의 호주머니에 든 돈을 빼오는 일. 전자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선생님이다. 후자를 잘하는 이를 우리는 사장님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두 가지에 모두 능숙한 사람이 있다. ‘마누라’란다. 얼마 전 들은 우스갯소리다.

 그러나 여자는 아내로서의 얼굴만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딸이기도 하고 어머니, 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특히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능력을 한층 향상시킨다는 연구결과가 많다. 미국 리치먼드대 연구팀이 암컷 쥐의 뇌를 출산 전·후로 나누어 비교했더니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덕분에 출산 후에는 처녀 적보다 용감해지고 먹이활동 움직임이 5배나 빨라졌으며, 공간 지각력도 좋아졌다. 인간 여성도 출산 과정을 통해 ‘뇌의 재구성’이 이루어져 모성애가 더 진해지고 인지능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셰익스피어의 말 그대로다.

 그제 밤 부산에서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화재사고가 발생했다. 아파트 7층에서 불이 나 어머니 홍모(33)씨와 아들(9), 큰딸(8), 작은딸(1)이 숨졌다. 소방관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큰딸은 입구쪽 작은 방에서, 홍씨와 나머지 두 자녀는 베란다에서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홍씨가 아들과 올해 2월 태어나 아직 첫돌도 맞이하지 못한 작은딸을 양팔에 꼭 껴안은 채 웅크린 자세였다는 점이다. 시커멓게 타버렸어도 어머니가 오른팔은 딸, 왼팔로는 아들을 감싸안은 형태가 분명히 구분되었다고 한다. 현장에 출동했던 부산 북부경찰서 제윤호(59) 형사3팀장은 “너무나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화재 사고 이틀 전 같은 부산에서 정반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17세의 미혼모가 4개월 된 아들을 모텔방에 두고 외출해 후배와 함께 서면 일대 유흥가에서 밤새 놀았다. 9일 새벽이 돼서도 “아이를 깨우기 싫다”며 다른 모텔에 들어가 술 마시고 잠들었는데, 혼자 남겨진 아기를 아침에 모텔 주인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진 뒤였다. 제 앞가림도 벅찰 열일곱 청소년 나이에 어머니 역할까지 감당하기는 무리였던 것일까.

 모텔방 영아 사망사건은 미혼모 혼자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딱한 구석이 많다. 아기 아버지는 엄마와 동갑인 소년으로, 올해 초 소년원에 수감됐다. 게다가 미혼모 소녀의 어머니 역시 미혼모로, 소녀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엄마와도 연락이 끊긴 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신 처지였다. 일방적으로 돌을 던지기 힘들다. 미혼모가 ‘소녀’와 ‘어머니’ 사이에서 방황할 때 국가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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