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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 <제39화>서북 청년회(8)|문봉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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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실력 행위 「러쉬」>양평정 공장을 탈환한 우리는 지체없이 전평의 목을 죄는 총 공세로 나갔다.
불과 며칠 뒤인 9월 초 경성방직 본 공장(영등포 역전)을 탈취했고 이어 고려방직(지금의 방림방적)·조선피혁을 비롯 대소공장을 차례로 휘어잡았다.
석전·몽둥이 세례·육박전 등 피가 튀는 나날이었다.
경방 본 공장엔 송태윤 총무부장이 공장장, 차종연 동지(평양·현재 삼척 지방서 석탄광 경영)가 부공장장 겸 총무과장, 기타 10여명의 대원이 경비 및 서무과 직원 등의 발령을 받아 새벽녘에 자치위를 기습, 일단 파업 주동자의 목을 자르는데 성공했으나 밤마다 역습해오는 그들과 근 한 달간 치고 받는 숨바꼭질을 해야만 했다.
전평 측의 반발은 사실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들은 힘이 부치자 6월 29일에 가입한 국제로연(좌익계)에 까지 제소, 조사단을 부르는 등 온갖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믿었던 노련 조사단마저 오긴 왔으나 군정청의 콧 방귀에 밀려났고 허성택 위원장을 비롯한 「리더」들은 체포령에 쫓겨 고개를 들지 못해 열세를 만회하려는 그들의 안간힘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세는 판가름이 나고 전평 측은 공장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평청의 기세는 서울 밖으로도 뻗쳤다.
송태윤 부장이 지휘하는 전위대 30여명은 곧장 인천에 출격, 동양방직(현 동일)·조선제마·야전장유· 조선「알루미늄」·대한제분 등을 잇달아 접수했다.
또 다른 부대들은 멀리 부산과 광주까지 내려가 조선방직·전남방직 탈환작전에 노총 및 우익청년 연맹들과 함께 가담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의 인천은 고인이 된 조봉암씨가 전평 위원장으로 있는 등 좌익이 드세어 『한국의 「모스크바」』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 그 속에서 보란듯이 듬직한 신흥사(신흥동)에 인천지부를 마련하고 『맹호, 인천에 나타났다. 적색도당은 포고와 동시에 처단한다』는 포고문을 전평 소굴인 공장가에 내다 붙인 대원들의 실력은 눈부신 것이었다.
동양방직에선 박청산 동지가 사감으로, 김광일(평북), 유근복 동지 등은 경비원으로 들어가 공원들을 기숙사에 모아놓고 반공교육까지 시켰었다.
그때 침투한 김·유 동지는 그대로 눌러앉아 현재 경비계장 인사과장으로 있다.
평청은 용산 철도 파업(9월 30일)과 경전파업(10월 1일) 때도 나가 한가락을 했다. 시민의 발을 묶고 서울을 암흑세계에 몰아넣은 두 파업은 궁지에 몰린 전평의 일대 「롤·백」작전이었다.
노총 전진한씨의 독청, 유진산씨 청총, 건총 등 우익단체가 총동원 된 철도파업 진압에서 우리는 기관고를 맡아 간단히 수습을 끝내고 여흥으로 남대문 옆 남로당 본부에 쳐들어가 적기를 찢어 내렸다.
이기하(신의주) 이준수(철원 노총 최고위원 역임) 이송겸 동지(함경)등이 주동이 된 경전파업 진압을 끝낸 다른 청년들과 합세, 인민위 본부(현 신민당 당사)에 들이닥쳐 내부인을 모조리 축출하고 대신 우리청년들로 입초를 세우기도 했다.
인민의 마지막 날이었다.
일제 때 이문당 서점이었던 건물은 후에 납치된 역도선수 서상천씨(현 「앰배서더」「호텔」 주인의 부친)의 도장이 됐다가 이 박사가 사들인 뒤 대한독립 청년단의 청사가 됐다.
확실히 46년 가을은 실력행위의 「러쉬」였다. 서북 청년들의 실력행위는 그해 늦가을 시천교회당(조계사 건너편)에서 열린 남로당 결당식에 수류탄을 투척한 사건으로 「피크」를 이루었다.
이 사건은 서북청년들이 수류탄을 쏜 첫 「케이스」이기도 하다.
결당식엔 박헌영·이강국을 비롯한 좌익계 간부들이 모두 참석했었고 여운형씨 등도 내빈으로 참석했었다.
수류탄은 식이 막 끝나고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를 물러날 즈음 연단 밑을 향해 투척됐다.
연단 위로 던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뜻이 박헌영 일당을 해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털어놓지만 행동대원은 장창원(함북·현재 부산거주) 동지 등 3명이었다.
사건은 의도대로 박헌영 등을 놀라게만 하고 끝났지만 이 소동으로 당시 합동통신 취재기자 변영권씨(동아일보 전 편집국장)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하나가 억울하게 날아갔다.
변영권씨는 뒤에 이런 내막을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48년 말 내가 한 한국일보의 정치부장으로 와 일했으니 인연이란 묘한 것인가 보다.
그에게는 이 사건을 지금까지 털어놓지 않았지만 지금도 본의 아닌 실수에 미안함을 금할 수 없다.
사건의 장본인인 장 동지 등은 그때 함북청 소속으로 평청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평청·함북청·화신청·황해청·원산청 등 이북 청년 단체들이 서청 주비위를 구성, 선우기성 동지의 지휘아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이 같은 거칠기 짝이 없는 일련의 실력행위가 아무런 배후도 없이 독자적으로 감행된 것이었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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