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제30화>서북 청년회(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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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테러」선언>
46년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미·소 공위 무기연기, 정판사 위폐 사건, 38선 월경 금지, 이박사의 단정계획 및 국대안 소요 등이 잇따라 터져 정국은 더욱 어수선했다.
우익의 일부 청년단체는 자유·중앙·인민보 등 좌익 신문사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공(남대문 옆)·민청 등을 습격한 반면 조공 측은 많은 공장과 학원을 장악, 기능을 마비시키기에 이르렀다.
선전공세도 열기를 띠어 「포스터」를 붙이다가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는 등 공기는 살벌하기만 했다.
이제 갓 태어난 평청은 숨돌릴 새도 없이 이 와중에 휩쓸려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에 당하다가 온 사람들인 만큼 이성보다는 감정이,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벽보를 내다 붙이던 우리 회원들도 좌익의 「해머」에 맞아 상당수의 부상자가 나고 있었다.
햇병아리였지만 평청은 서슴지 않고 포고문1호를 냈다. 『평안청년회는 전적으로 좌익을 타도한다』는 무시무시한 「테러」선언이었다. 포고문이란 말은 계엄군에나 어울리는 것이지만, 이왕 실력으로 나가는 마당에 못 쓸 말도 없었다.
포고문은 『「테러」에는 「테러」로 대항한다』는 평청의 행동강령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포고문은 선우기성 부위원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박청산 동지(당시 총무부 소속)등이 「베트콩」식으로 출몰하여 내다 붙였다.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땀나는 순간이지만, 그런 속에서도 웃지 못할 일은 많았다.
그 중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은 「빌딩」에 포고문을 붙일 때. 거추장스럽게 사다리를 들고 다닐 수는 없고 부득이 동지의 어깨 위에 한 사람이 올라서서 후딱 붙일 수밖에 없는데 그때마다 서로 받침이 되지 않겠다고 해서 승강이가 벌어지곤 했다.
승강이는 그 뒤 최연소자가 받침이 되기로 결정이 나 겨우 가셨다. 그래서 미도파백화점 2층에 포고문을 붙일 땐 박청산 동지가 가장 나이가 적어 받침이 됐다.
평청은 황해 청년회(46년 1월 발족)·함북 청년회(46년 3월 발족) 등 우익단체와 나란히 신탁통치 및 미·소 공동위 5호 성명(찬탁단체라야만 교섭단체로 인정한다는 요지) 반대「데모」를 벌이는 한편 곧장 포고문을 행동으로 옮겼다.
제일 먼저 「테러」의 「타기트」가 된 곳은 정판사(경향신문자리)와 좌익계 현대일보사 (시대백화점 맞은편 「뉴욕」제과 자리)-. 정판사는 5월 15일 위폐사건이 발표되자 『우리는 위폐와 무관하다』 『인민전선 만세』등의 「플래카드」를 길게 내걸어 놓았다가 「테러」를 당했다.
비위가 상한 우리는 즉각 반대구호의 「플래카드」를 마련, 송태윤 총무부장·반성환 훈련부장·박청산 동지 등을 출동시켰다.
걸려있는 것을 찢고 우리 것을 내걸자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송 동지 등이 4층 정판사 건물에 갖고 간 사다리를 걸치고 막 올라가는 순간 옥상에서 돌멩이가 비오듯 쏟아졌다. 옥상에 돌을 쌓아놓았다는 것을 미처 모른 실패작전이었다.
오히려 피해가 났다는 급보를 받은 우리는 사무실에 있던 50∼60명의 회원을 증파, 석전 끝에 정판사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대일보 습격은 정판사 때의 실수를 거울삼아 치밀한 작전아래 감행했다.
현대일보는 사무실만 현 「뉴욕」제과 자리에 있고 공장은 현 대성 「빌딩」에 있었다.
습격의 불씨는 평청이 YMCA와 정동예배당에서 계속해온 이북실정 보고회를 『악마』운운하며 사설로 공격한 것이었다.
내가 주간 박치우(문필가동맹 간부)와 담판을 하기로 하고 실패하면 인쇄시설을 모조리 파괴하기로 했다. 대성「빌딩」주변엔 미리 1백여명의 대원을 풀어놓았고 공장과 사무실사이엔 10m간격마다 역시 대원들을 배치시켰다.
실패했을 경우 내가 창문너머로 손수건을 흔들어 신호를 하면 길에 늘어선 대원들도 차례로 손을 번쩍 들어 이 신호를 「릴레이」, 순식간에 공장시설을 부순다는 작전이었다.
그날 나는 이주기 재정부장·김성주 사업부장·송태윤 총무부장 등 5명을 대동, 박주간을 만나『같은 「스페이스」로 사과문을 게재하라』고 요구했다. 송 부장은 유도4단이고 모두들 한가락씩 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동지는 박 주간의 면상을 치는 등 30분간이나 족쳤으나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끝내 우리의 요구를 거절했다.
나는 작전대로 손수건을 흔들었으며 그 순간 신호는 전광처럼 행동대에 전달되어 인쇄시설이 박살 났다.
여운형씨가 관리인인 이 공장은 당시 인민보와 중앙일보도 찍었기 때문에 이날의 거사는 1거 3득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날의 말썽으로 현대일보는 군정청에 의해 정간처분 됐으며 공장관리인 여운형씨도 해임되었다.
공장은 그 뒤 부서진 유리창도 못 끼우고 있다가 48년 초 내 손에 들어와 평화신문사가 됐으니 묘한 운명이라고나 할지 모르겠다.
솜씨는 처음부터 괜찮았던 편이다.<계속>

<문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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