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기 탄탄한 벨기에 … 조직력 허점 눈여겨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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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 히어로’ 설기현(34·인천·사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벨기에 축구 전문가다. 2000년 앤트워프에 입단해 한국선수 최초로 벨기에 프로 무대를 밟았고, 이듬해 명문 클럽 안더레흐트로 이적해 4년을 더 뛰었다. 경기도 파주 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서 아시아축구연맹(AFC) B급 지도자 코스를 이수 중인 설기현이 바쁜 와중에도 9일 중앙일보와 만나 벨기에 축구를 설명했다. 내년 6월 26일 벨기에와 브라질 월드컵 H조 조별리그 3차전을 치를 홍명보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다.

한국은 월드컵에서 1998년 프랑스 대회 이후 16년 만에 다시 벨기에와 격돌한다. 당시에는 1-1로 비겼다. 내년 월드컵에서도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라는 게 설기현의 분석이다. 사진은 2012년 9월 열린 벨기에와 크로아티아의 2014 브라질월드컵 유럽예선. [브뤼셀 AP=뉴시스]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벨기에와 한 조에 묶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옛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뛰었고, 한편으로는 우리 대표팀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꼈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조 붉은 악마’ 벨기에는 강한 팀이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은 아니다.

 벨기에 축구의 특징은 자유분방함이다. 잉글랜드의 ‘킥 앤드 러시(롱 패스 위주)’, 스페인의 ‘티키타카(짧은 패스 위주)’ 등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색깔이 없다. 클럽마다 선수를 길러내는 방식과 기준이 다르다. 유럽 각국의 다양한 장점을 능동적으로 흡수하는 벨기에 사람들의 유연성이 대표팀의 수준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는 생각이다. 각 팀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기본기를 중시하는 분위기다.

벨기에 이후 잉글랜드(울버햄프턴·레딩·풀럼)·사우디아라비아(알힐랄)·한국(포항·울산·인천) 등 다양한 리그를 경험했는데, 기본기 훈련의 비중은 벨기에를 따라갈 나라가 없다.

 특유의 다양성은 때로 ‘조직력 결여’로 나타난다. 벨기에 시절 경기에서 지면 서로를 헐뜯으며 책임을 전가하거나, 한두 명의 선수가 부진할 때 주변 포지션의 선수들까지 한꺼번에 무너지는 상황을 자주 목격했다. 조직력과 팀워크를 최우선 가치로 알고 뛰었던 한국축구와 분위기가 너무 달라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벨기에 리그 자체가 빅 리그 진출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무대다. 그러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인 경쟁의 풍토가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다. 지난달 벨기에가 안방에서 일본에 2-3으로 졌는데, 역시나 경기력보다는 조직력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전술적인 색채가 또렷하고 정신적으로도 잘 무장된 이탈리아나 스페인·독일 등을 만나지 않은 건 (홍)명보 형의 천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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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기에의 또 다른 약점은 체력이다. 유럽 국가들은 자국 리그를 마친 직후에 월드컵 준비를 시작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져 있다. 이제는 우리도 유럽축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친 만큼 체력의 우위를 적절히 활용하면 경기를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다. 대표팀 멤버 중 K리거들이 조금 더 분발해야 할 부분이다. 기술은 좋지만 체력에 문제점을 지닌 유럽팀을 상대로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 2002 한·일 월드컵이 보여주지 않았나.

 첨언하자면 벨기에 선수들은 이상하리만치 몸싸움에 소극적이다. 체격 조건의 차이에서 오는 제공권의 열세는 어쩔 수 없더라도 경기 중 시도하는 몸싸움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조언하고 싶다.

 공격수 입장에서 가장 껄끄러운 상대는 중앙수비수 빈센트 콤파니(27·맨체스터시티)다.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들로 이뤄진 벨기에 핵심 멤버 중 유일하게 함께 뛰어본 선수이기도 하다. 안더레흐트 시절 팀 동료였는데 유소년 시절부터 체격, 스피드와 점프력, 몸싸움, 투지 등 모든 면에서 확 튀었다. 정면승부나 고공축구로는 콤파니를 무너뜨리기 어렵다고 단언할 수 있다. 협력플레이와 측면 위주의 공격 패턴을 추천한다.

 벨기에는 젊고 강하다. 향후 10년간 세계축구를 뒤흔들 재목이라는 평가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브라질 월드컵이 ‘벨기에 천하’의 시작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축구에서는 실력 못지않게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직 덜 여문 강자와 만난 건 홍명보팀의 또 다른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정리=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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