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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제30화>서북청년회(5)|문봉제<제자 문봉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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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평안청년회>
소 영사관을 습격한날 밤 만든 것이 바로 평안청의 전신 평남 동지회였다. 좌익의 숨통을 누르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힘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오던 터여서 낮의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 그 조직을 한 것이다. 또 그때까지 넘어온 서북 청년들의 숫자가 2만명을 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서로의 호구지책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조직체는 절박한 것이었다.
조직이라고 하니 거창해 보이지만 당시는 간부명단만 미군정청에 등록하면 사회단체가 될 때. 우리의 평남동지회도 실은 그런 식의 날림단체였다.
우리일행 11명과 송태윤 동지(전 서울공대 교수·현 대한광업진흥공사 석탄개발 계획단)가 여관방에서 함께 자며 『회장 문봉제, 총무부장 송태윤, 선전부장 제기은 등등』 전원에게 감투를 하나씩 배정해서 이튿날 그 명단을 갖다낸 것이 곧 발족이었다.
요새 같으면 유령단체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나 그때는 모든 것이 무질서하기 짝이 없을 때여서 이런 식이 통했다.
평남 용강이 고향인 송태윤 동지는 월남하기 전 조만식 조민당 당수가 이승만 박사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45년12월20일과 46년1월 등 두 차례에 걸쳐 평양과 서울을 잠행했던 밀사(친서 내용은 반탁에 관한 협의).
그는 그날 낮의 소 영사관 습격 소식을 듣고 우리 대송여관에 찾아와 처음 만난 것이다.
아뭏든 평남 동지회는 이같이 엉터리로 된 것이었지만 일을 하겠다는 결의만큼은 결코 엉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며칠 뒤 조민당 김병연 정치부장 등의 알선으로 동아일보 3층 회의실(그 때는 3층뿐)을 얻어 간판을 내걸었다.
돈줄이 있을리 없는 우리의 신접살림은 처음부터 말이 아니었다. 당시 조민당 중앙위원이던 박현숙씨(전 국회의원)가 부인회에서 얻어준 책상 1개, 의자 2개가 유일한 재산이었다.
평양 동지회는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먼저 조직확대에 주력한 결과 정주서 내려온 선우기성씨(현 청우회 부회장)등 평북출신과의 제휴에 성공, 하루아침에 전 평안도를 묶는 대조직으로 개편됐다.
이것이 평안청년회다.
우리는 그때까지 전 평안도 규합은 미처 생각 못하고 상당한 인원만 포섭한 뒤 곧장 행동을 일으킬 셈이었는데 우연히 나타난 선우 동지 덕택에 비약적인 조직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평남 동지회는 뚜렷한 활동을 못한 채 막을 내렸지만 혜성과 같이 등장하는 평청의 초석이 된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평청이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4월20일께. 개편을 위한 그 동안의 준비작업은 피나는 몸부림이었다. 피난민들이 줄지어 넘어 올 때여서 회원 확보는 누워서 떡 먹기였지만 조직에 따른 자금조달이 역시 가장 큰 문젯거리였다.
우리의 형편은 너 나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점심을 굶는 판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때 큰애를 쓴 이가 선우 동지였다. 선우 동지는 숙식처를 못 구해 남산신궁 빈방에서 잠을 자고 날이 새면 고향 후배인 이주기씨(남대문 시장 안·전 노총사무국장) 집에서 아침을 얻어먹을 때였다. 그런데 이 이주기씨는 북경서 큰 장사를 하다가 10만원을 갖고 월남해 온 거부 오계석씨의 사위.
선우 동지가 이 사정을 알고 날마다 오씨에게 매달려 『흐지부지 없애지 말고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하자』고 설득, 4월 중순 마침내 5천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 돈이 평청 결성의 자금이 됐으며 이 돈이 없었더라면 평청도 없을 뻔했다.
선우 동지와 나는 너무나 감격, 오씨의 사위 이주기씨를 그 뒤 평청의 재경부장으로 추대했다. 자금을 얻어낸 우리들은 그날부터 한편에선 『4월×일(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남) 동아일보 3층에서 평청을 결성하니 평안도 청년들은 빠짐없이 모이라』는 방을 쓰고, 한편에선 풀통을 메고 거리로 내닫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갔다. 점심은 굶지만 우리는 신바람이 났다.
드디어 평청 결성의 날-. 5백 여명의 젊은이들로 동아일보 3층 회의실은 메워졌다.
우리는 1, 반공 2, 반탁 3, 자주독립 4, 통일의 4대 행동강령과 집행부 구성 등의 의사를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회장에 모사로 통한 백남홍 조민당 사무차장, 부회장에 선우 동지와 나, 총무부장에 송태윤, 조직부장에 이성수, 선전부장에 채기은, 정훈부장에 강시룡(평북 창성), 사업부장에 김성주(평북강계·김성주 사건의 장본인)등이 각각 선출됐다.
김성주씨는 선우 동지나 나나 모두 모르는 얼굴이었으나 회의석상에서 『의장!』하고 뻔질나게 발언권을 신청한 덕택에 간부로 선임됐다. 그 때도 회의석상에서 발언을 많이 하면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나 보다.
우리는 그날로 평남 동지회의 간판을 평안청년회로 바꿔 달고 대림조 토건회사(일인소유) 직원 박청산 동지(현 한국 노사문제 연구협회 회장)가 남영동 성남극장 건너편 회사창고에서 훔쳐온 책상 2개, 의자 4개, 「잉크」 및 양면괘지 뭉치로 새살림을 차렸다. 행동이 앞섰던 우리들은 이제야 조직을 갖추고 좌·우익의 전선에는 풍운이 일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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