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우방 참전부대(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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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전을 지원한 우방참전국 중 「유럽」지역에서는 영국을 필두로 「네덜란드」·「프랑스」·「그리스」·백이의·「룩셈부르크」등 6개국이 군대를 파견, 한국전을 지원했다.
백이의는 7백명의 지원병 외에 인접국가인「룩셈부르크」 소대 50명을 포함, 모두 7백50명의 1개 대대를 「크라혜」 중령인솔아래 파한하여 영연방 여단 및 미3사단에 배속시켜 싸우도록 했다.
특히 세계최소국가의 하나인 「룩셈부르크」는 1개소대병력 50여명이 참전, 우방16개국 중 가장 적은 규모였으나 이들은 인구비례로 따진다면 자유우방 어느 나라보다 많은 군대를 보낸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인구34만명 밖에 안되는 「룩셈부르크」가 한국전 3년 동안 파견한 연병력 1백여명은 인구비율로 보아 참전16개국 중 가장 많다는 것이다.
2차 대전 당시만 해도 군대를 갖고있지 않았던 「룩셈부르크」는 1945년에 처음으로 군대를 편성했기 때문에 한국전참전당시의 병력은 보잘것없었지만 이들은 「유엔」의 일원이라는 긍지와 조국의 명예를 위해 잘 싸웠다.

<『나는 옹호한다』 슬로건 내걸어>
「룩셈부르크」소대는 『예·마인티엔드라이』(나는 옹호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비록 숫자는 적었을지언정 후퇴할 줄 모르는 용기를 보였다. 또 이 소대는 당시 「샤를로트」여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C」자 위에 1「인치」 정도의 청동왕관이 있는 휘장을 달고 있었다.
한편 본대인 백이의 대대는 51년1월31일 부산에 도착한 다음 일간의 훈련을 끝내고 51년2월말까지는 왜관·대구·김천 사이의 주요교통로 경비업무에 주력했고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것은 정년3월부터였다.
한국전 3년 동안 백이의 대대가 겪은 주요 전투는 51년3월 서울탈환작전과 공산군의 1차 춘계공세가 전개되던 51년4월 임진강전투, 51년10월의 철원동 북방 학당리전투, 52년4월의 임진강부근 적거리전투, 53년1월의 김화 서북방 잣골(백동) 전투 등을 들 수 있다.
「룩셈부르크」소대는 백이의대대 소속부대로 편입행동을 같이 했기 때문에 전투상황은 별도로 취급하지 않고 백이의군과 함께 다루겠다.
51년3월 초 동대대는 한강남쪽 지금의 영동지역에 미15연대1대대가 지키고 있던 방어선을 인계 받아 진지를 지키면서 뚝섬에 몰려있는 적을 정찰했다.
이때 적은 강을 건너와 여러 번이나 동대대를 공격하였으나 백이의군은 그때마다 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51년3월 「유엔」군이 총반격을 시작했을 때 백이의대대는 미제15보병대와 함께 싸웠고, 3월24일 의정부 동쪽 155고지에서 적의 저항을 뚫고 아군의 진로를 개척하기도 했다.
51년4월4일 동대대는 영국군 제29여단에 배속되어 중공군의 춘계대공세가 시작되었을 때는 임진강 북쪽 연천지방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인해전술로 기습해온 중공군은 주저항선의 전초에 나가있는 백이의군을 제일 먼저 완전히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백이의군은 끝내 진지를 사수했다.
다음은 장덕상 본사 전주불특파원(현 외신부장)이 백이의 참전장병들과 직접 만나 그들로부터 들은 당시의 한국전회고담.
▲「알베르·크라헤」씨(당시 중령·백이의대대장·현 사업·67) <한국파유대는 순전히 지원병을 모집하여 편성했습니다. 50년7월 백이의정부는 한국참전을 결정한 후였으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지원병모집이 상당히 어려웠어요. nato에 백이의군을 가입시키기 위해 많은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p>

<지원병 2천명 넘게 몰려들어>
그런데도 지원병을 모집하고 보니 2천명이 넘게 몰려들었어요. 이를 엄선하여 7백명으로 1개 대대를 편성, 「륵셈부르크」에서 파견된 1개 소대를 포함시켜 한국에 파견되었읍니다.
현지에서 약3개월간 훈련을 받고 50년12월18일 「브뤼셀」을 출발, 51년1월3l일 부산에 도착했읍니다.
한국전에 처음 참가해서 우리가 애를 먹은 것은 우선 산악이 많은 지형이라서 힘들었고 또 참전직후에는 무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곤란을 받았죠.
51년3월 「유엔」군의 반격을 따라 한강연안까지 진출했을 때 무기가 도착하여 병사들의 사기도 올랐읍니다.
백이의 대대가 한국전에서 벌인 가장 큰 전투 중의 하나인 51년4월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를 맞았을 때 우리는 영 29여단에 배속되어 연천·전곡에 있었어요.
4월22일부터 3일 동안 격전을 치렀는데 중공군의 대공세가 있기 며칠 전에 우리는 이 지역에서 많은 적을 포로로 잡았읍니다.
중공군의 공격은 4월22일 밤부터 시작되었어요. 아군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마주보고 있었고, 아군의 반격이 1개 여단 5천명정도에 비해 중공군은 3개 사단규모의 병력을 끌고 강을 건너왔읍니다.
적이 이 같은 대공세를 폈으면서도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적의 보급이 잘된 까닭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대대는 24시간 진지를 방어했습니다. 하루가 지났을 때 여단본부로부터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이때 이미 영 연방군 2개 연대가 적의 포위공격을 받아 괴멸할 상태에 있었읍니다.
백이의 대대는 따라서 퇴각하면서 후퇴하는 영 여단을 엄호해야만 하는 임무를 맡게되었어요.
4월25일 마지막 철수부대를 엄호할 때 지휘하다가 나는 수류탄파편을 맞아 다리와 말에 부상을 입었읍니다.
곧 일본으로 후송되었고 우리대대는 부대대장이었던 「비바리오」 소령이 지휘했는데 그는 그후에 진급, 참모총장까지 지내고 지난 71년에 퇴역했읍니다.
중공군의 춘계대공세 때 우리도 상당한 피해를 보아 전사자만 15명이나 생겼습니다. 그후 백이의 대대는 김포반도로 와서 이곳의 「게릴라」 소탕 및 경비업무를 맡게되었고 나는 3주일간 일본에서 치료받은 후 다시 일선으로 왔읍니다.

<산악전은 훈련 안돼 많은 시련>
51년6월 연천지역 임진강으로 다시 올라왔어요.
우리가 다시 와보니 참호는 전혀 쓸 수가 없게되었고 참호마다 중공군의 시체가 그득합디다. 이때가 백이의군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전투였던 것 같아요.
시체들이 무릎까지 차있고 냄새가 지독했읍니다. 또 질병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구요. 애를 먹었던 것은 산 위에까지 무기와 보급품을 운반하는 일이었는데 산악지대가 없는 나라에서 자라온 우리들에게 산악전이란 엄청난 시련이었습니다. 일본에서 3주일동안 치료를 끝내고 임진강 재진격 때 다시 지휘했읍니다.
그리고 이때는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있어 전선의 전투는 소강상태를 이루고 소규모 정찰전이 활발했어요.
8월 중순께는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크게 불어 아군 2개 대대가 임진강 건너편에 고립된 상태에 있었으나 이들도 적의 공격을 잘 막았습니다. 강물이 불어나 배로는 도저히 건널 수가 없어 고립된 부대에서는 보급품을 낙하산으로 전달하기도 했어요. 백이의 대대는 강물이 불어나기 전에 적으로부터 사흘동안 계속해서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별다른 피해 없이 잘 막았어요.
50년9월1일 우리대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후속부대와 임무를 교대했습니다. 1년 근무의 기한이 이날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실제전투에 참가한 것은 51년2월이었으나 부대편성은 50년9월1일로 1년이 경과했읍니다.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도 l백여명의 병사들은 지원하여 남아 후속부대와 합류했습니다. 새로 도착한 대대는 2개 소총중대와 1개 중화기중대로 편성되었어요.
나는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이 무렵 다시 일본으로 갔읍니다.>

<1분대로 적 2개 중대와 대결>
▲「모세·졸리」(참전당시 상사·현 토목사업·46) <나는 51년1월31일부터 52년6월말까지 1년5개월간 참전했읍니다.
우리가 2차로 청진강 지역에 진격했을 때는 인명피해가 꽤 많아 1백50여명의 한국인 지원부대를 받았읍니다.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고 노무자들인 것 같았어요.
이들은 보급품이 풍부하고 군복과 총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더군요. 이들은 주로 보급품을 산으로 운반해주는 일을 도와주었어요.
7월1일 우리분대가 임진강 정찰임무를 맡고있는데 중공군 2개중대가 배를 타고 건너와 습격했어요.
내가 지휘한 정찰대의 임무는 중공군의 참호를 직접 확인하고 오는 일이었어요. 중공군의 참호 1백m앞까지 접근하여 경찰임무를 끝내고 되돌아오다가 적과 마주치게 되었죠. 약2시간동안 전투는 계속되었는데 아군 1명이 전사하고 나는 다리에 기관총을 맞아 부상했습니다. 2시간동안 격전을 벌이고 있으려니까 영국군의 지원부대가 왔어요. 다음날 이 자리에 다시 와서 살펴보니 적 시체가 15구나 있더군요. 나는 상사로서 부소대장 임무를 맡고 있었읍니다.>
◆주요일지(1952년9월1일∼4일)
※1일 ▲피아공중전 6회 전개 적기 2대 격파 ▲미공군기, 무산철광대폭격
※2일 ▲한일, 포로수용소사건 항의제출 ▲이 대통령, 일본밀항자 철저 단속지시 ▲「스탈린」, 모택동과 대일전 승리7주년 「메시지」 교환.
※3일 ▲뇌염으로 각급 학교 휴교 ▲대통령저격사건결심공판, 김시현과 유시태에 사형구형.
※4일 ▲적 「제트」기 11대 격추 ▲공화당의 「아이크」 후보, 「트르먼」 정책비난.
◆알림=3백76회까지 게재된 「민족의 증언」을 4권의 책에 수록하여 12월 하순에 발행합니다.
이에 관한 문의나 연락은 을유문화사(73-8153)나 중앙일보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28-82l1(교환)의 74)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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