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인류학자 『마거리트·미드」 자서전(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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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결혼 2년째 되던 해에 나는 현지로 떠나기로 굳게 결심했다. 나는 무엇인가 변화를 찾아 일하고자 했는데 새로운 고장에 가서 새로운 습관을 찾든가, 옛날식 그대로 살고있는 오랜 지역을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나 혼자 결정하도록 되어있지 않고 은사이자 「컬럼비아」대학의 인류학과장인 「프란츠·보아」교수의 허락이 필요했다. 「보아」교수는 그 당시 한 문화권 안에서 서로 다른 개체들의 발달과정을 다룰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 내게 청년층의 소녀들을 연구하도록 권했다.
나는 이미 박사학위논문을 동일한 지역 안에서 상이한 문화유형의 비교로 정하고 연구 중이어서 「폴리네시아」로 떠나야했다. 그때 「보아」교수는 우리를 마치 손자를 대하듯 했기 때문에 「파파·프란츠」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에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분이었다.
나도 또한 마음을 굳게 먹고 그렇게도 내가 열중했던 「폴리네시아」로 떠나기를 원했다. 그는 「폴리네시아」로 떠나는 것이 위험하며 조사중 죽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내게 되풀이 말하여 「아메리카·인디언」을 대상으로 하라고 말했다. 「보아」교수가 허락치 않는 「폴리네시아」로 떠나기 위해서는 다른 장학금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폴리네시아」로 가기로 결정하는 한편 청소년 연구도 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되풀이하여 그를 설득, 마침내 「보아」교수가 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폴리네시아」 등에서도 내가 가고자했던 휴양지 「투아모투」섬을 가는데에는 반대했다. 대신 적어도 3주일에 한번쯤은 정기적으로 배가 가닿는 섬을 택하도록 했다. 「보아」교수는 이런 조건으로 내게 허락을 하고 장학금을 얻는데 필요한 추천을 해줬다.
「보아」교수와 이렇게 다투는 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보아」교수가 연구의 여지가 많은 곳으로 가게 하는 대신 이미 수없이 연구된 「아메리카·인디언」을 대상으로 연구할 것을 권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내게 세계여행을 할 돈을 주겠다고 제의, 이제 나는 장학금이 아니라도「폴리네시아」여행을 할 수 있게되었다.
이렇게하여 1925년에 「보아」교수와 아버지모두 내가하려는 일을 허락했고, 23세가 된 나는 기쁨에 넘쳐 「그 큰 기쁨으로」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 열광적인 봄에 「루더」는 점차 사라져 가는 시골교회를 「테마」로 논문을 끝냈고 나도 논문을 완성했다.
「메이·데이」 「이브」에 장학금을 얻게됐다는 최종결정을 듣고 옛 「버너드」친구들이 모여 「그리니치」에서 축하모임을 열어줬다.
우리는 문에 야생화로 가득 찬 「바스킷」을 걸어놓고 놀았다. 「바스킷」에는 그 당시「뉴요크·월드」지에 연재 중이던 「칼럼」 「사령탑」을 걸어놓기도 했다.
여름철을 「루더」와 나지 각기 「사모아」와 「유럽」으로 떠날 준비를 해가며 농장에서 보냈다. 여름동안 「뉴요크」로 외출한 것은 단 한번, 「아메리카」박물관 관리자인 「플리니·고다르」와 「사모아」에서 돌아온 후 맡게될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출발을 위해서는 긴 시간과 여러 종류의 물건들을 챙기는 준비가 필요했다. 여행을 앞두고 마지막 며칠은 예방접종을 하고 여권과 돈을 챙기며 옷을 준비하는 등 분주히 지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 「루더」와 나는 여름이 끝날 무렵 함께 마지막 휴가를 즐기고 나는「사모아」, 「루더」는 「유럽」으로 향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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