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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 <제자 정인승>|<제29화>조선어학회 사건|정인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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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전 편찬회 조직>
한글의 맞춤법 통일안·표준어·외래어 표기법 등 사전 편찬의 기초 작업은 모두 완성되었으나 실제의 사전 편찬 업무는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다.
1929년10월31일 서울 수표동 「조선 교육 협회」 회관에서 1백8명의 발기인으로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 집행 위원으로 신명균·이극로·이윤재·이중화·최현배 5인을 뽑았으나 그 동안 실제의 사전 편찬 일은 별로 진전을 보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1936년3월20일 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비를 담당하는 등 학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오던 이우식을 중심으로 전부터 사전 편찬회 발기인이었던 인사 14명이 모여 사전 편찬을 촉진키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했다.
이우식 김량수 장현식 김도연 이인 서민호 신윤국 김종철 실태희 실원식 윤홍섭 민영욱 임혁규 조병식 등 14인의 뜻 있는 인사들은 자리를 같이하고 1만원의 회사 금융 거두어 쾌히 내어놓았다.
그리고 1만원의 사전 편찬 착수금으로 3년만에 편찬 작업을 끝마치도록 당부했다.
이 자리에는 조선어 사전 편찬회 측과 조선어학회 측이 참석, 회의를 열고 그때까지의 편찬회는 발전적 해소를 하고 사전 사업 일체를 조선어학회가 전담, 수행키로 합의되었다.
이때부터 조선어 사전 편찬 업무는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1936년4월1일부터 서울 화동 129번지 사무실에서 사전 편찬 실무를 개시했다.
이때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실무 계획을 보면 편찬 자금 1만원으로 만 3개년에 걸쳐 현대 표준어로 한글 전용의 일반 대사전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편찬전임 집필위원으로는 내가 주무를 맡고 이극로·이윤재·한징·이중화가 위원ㅇ이었으며 뒤에 권승욱·권덕규·정태진이 참가했다.
편찬 실무에 착수한 편찬 전임 집필 위원들은 우선 어휘 수집에 있어 1928년 「조선 총독부 중추원」에서 만든 일본어 대역으로 편성한 어휘집 「조선어 사전」과 1897년 영국인 선교사 「게일」이 만든 영어 대역의 「한영 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어휘들을 전부 수용하는 외에 각종 신문·잡지·소설·시집 및 고전 언해·역사·지리·관제·기타 각 전문 방면의 문헌들에서 널리 캐어내는 한편 기관지 「한글」의 독자들과 방학 때 시골로 가는 학생들에게 부탁하여 각 지방 말들을 모으기에 온갖 힘을 다했다.
그리고 각 어휘의 주해에 있어서는 낱말의 짜임새, 말뜻 잡기, 쓰임새 등의 실태 조사와 실물 실감들의 묘사·표현 등에 편찬원 각인이 책임을 분담하는 한편 때로는 상호 의견을 합작하는 방법으로 「카드」 작성을 진행했다.
사전 편찬에 애로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골치를 썩인 것은 전문 어휘의 처리였다.
조선어학회는 권위 전문가 50여 인사에게 어휘 주해를 요청, 간곡히 부탁했으나 당시 일제 치하의 불안한 시국 환경의 사정으로 전문 권위자들도 승낙을 주저하거나 실행을 머뭇거리는 분이 많았다.
그러나 물리학·화학에 이만규, 수학에 이명철, 곤충학에 조복성. 천문학에 이원철, 불교어에 송병기, 민속어에 송석하, 제도어·음악 용어에 이중화, 고어·궁중어에 권덕규, 식물학에 이덕봉, 한의학에 조헌영, 수산학에 정문기, 체육어에 이경식, 기독교어에 강병주, 고전 건축용어에 권상로, 현대 문학 용어에 김문집, 속담·은어에 이용기 등은 쾌히 승낙하여 성실히 수용해 성심 성의껏 주해를 돌보아 주었다.
그러나 비밀 후원회와 약속한 3개년이 지나 1939년이 되었어도 어휘 수집의 일은 대체로 마감할 만큼 되었으나 주해 진도가 늦어져 1개년을 더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 후원회는 사전 편찬의 애로와 노력을 인정, 목표 기한을 1년간 더 연기하도록 하는 한편 소요 자금 3천원을 더 추가 지급키로 했다.
그동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도 표준어가 제정됨에 따라 1937년3월1일 김윤경 이희승 이윤재 최현배 이극로 김병제 정열모, 그리고 나까지 8명의 수정 위원 손으로 1차 수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연기했던 1년이 또다시 다 지나간 1940년3월말까지도 주해 사무가 미진 상태에 있는채 자금은 다시 다 쓰고 말아 바닥이 났다.
그러나 조선어학회는 1939년 연말에 우선 원고 작성이 완료된 전체의 3분의 1 가량 되는 일부분의 원고를 총독부 도서과에 내어 1940년3월13일 본문 중 많은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겨우 출판 허가를 받아 놓았었다.
편찬 자금이 없는 상태에 놓인 조선어학회는 다시 비밀 후원회에 자금을 요청할 수도 없어 가슴을 태우고 있을 때 이우식이 이를 딱하게 생각하여 원고 작성이 끝날 때까지 매월 2백50원씩을 내어놓기로 했다.
이리하여 다시 편찬 사무는 활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출판 허가를 받은 원고를 대동 출판사 노성석 사장의 특별한 호의로 1942년 봄부터 초판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후 조선어 사전은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1, 2, 3권이 해방과 더불어 6·25 사변 전에 출판되었고 4, 5, 6권은 1957년 한글날까지 완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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