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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광양 은장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은장도는 옛 여인의 정절도. 작은 칼날의 서릿발에 숱한 한국여인의 애화를 담아왔다. 옛날엔 으레 시집가는 딸에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친정 어머니가 가만히 옷고름에 달아주곤 하던 칼이다.
은장도의 본고장으로 이름나기는 전남광양. 어쩌다가 규모 있는 집안에서 종이 자르는 칼로나 사용되고 있을 뿐, 본 고장인 광양에서조차 흔히 구경할 수 없다. 더구나 칼 자체가 지녀온 충절이나 단심의 비가 같은 은은한 뜻은 찾을 길이 없다.
다행히 광양에는 아직도 은장도의 장머리라 할 수 있는 박용기씨(42)가 옛 모양을 갖고있는 장도를 제조,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박씨조차 『보기 좋고 값싼 신식 칼이 마구 쏟아지는 판에 옛것을 고집하는 내 자신이 쑥스럽다』했다. 이해와 타산의 울타리 밖에서 호젓이 늙어 가는 노송과 같은 그런 품이다.
일편단심 은장도라 불리는 패도는 고려 때 우리 나라에 들어온 몽고병사들이 옷고름에 차고 온 것이 그 시조로 알려지고 있다.
광양은 당시「만주섬」으로 불러 귀양 온 선비들이 소일거리로 몽고명사들의 그것을 흉내내어 만들면서부터 패도의 토산지가 됐다는 것. 하지만 그 뒤로부터는 도장을 백정 다음가는 상인으로 취급해 와 그 유래라든지, 얽힌 설화들이 파묻혀 7백년의 자랑스런 역사보다는 단 1백년 앞의 구전도 확인하기가 어렵다.
현지에서 알려지기는 은장도 도장의 정통파는 해방되던 해 숨진 장일성 노인(당시80세)으로 현재는 그의 문하생인 박씨와 강동내씨(51)뿐. 그나마 강씨는 수년 전부터 몸져누워 거의 은퇴한 셈으로 박씨 혼자 그 명맥을 잇고있다.
그때 장씨는 칼 한 자루를 주문 받으면 조히 석달을 걸려야 완성해 내곤 했다. 「칼쇠」를 골라 연금을 하는데 한달, 경골을 깎는데 한달, 장석세공에 한달… 이렇게 걸려서야 매끈한 은장도 한 자루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칼날이 서지 않으면 식음을 끊고 겨울에도 찬물로 목욕하고 칠성단에 정화수까지 떠올려 칠일묵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박씨는 옛 스승의 몸가짐을 전했다.
패도는 칼쇠로 불리는 강철을 불에 달궈 때리는 일로 시작한다. 도신(칼날과 칼등)이 되는 부분은 20여회나 숯불에 달궈 쳐서, 강한 듯하면 기름에, 약한 듯하면 바로 물에 담가낸다. 구리에 이끼를 배합한 백동은 장석이 된다.
도장의 기술은 이 때 칼날을 세우는데 따라 그 우열이 가려진다. 날카롭고 강하기만해서는 부러지기 쉽고 무르면 제 생명을 잃는다.
도신에 일편심의 글씨를 문양으로 새겨 넣고 장석을 다듬은 뒤 꽃자주색 또는 남색으로 물들인 명주 끈을 아래위 「고리매듭」으로 잘끈 매어 그사이에 칼을 낄 때까지 34종류의 공정을 거치는데 이외에도 한 자루의 칼이 되기까지 잔손이 가는 일은 수 없다.
칼은 그 모양과 그것을 차는 신분에 따라 5가지로 구분이 된다.
칼자루나 칼집이 8각형으로, 고리가 메뚜기 모양으로 된 것이 팔각도로 이는 상감이나 중신들이 찼고, 새 모양의 을자도는 원통형으로 원님이나 현감양반들이 찼다. 또 칼자루·집 등이 원통형이나 을자도처럼 양쪽 끝이 꾸부러지지 않은데다 고리모양이 여치로 된 것이 평민들이 사는『막빼기』칼, 은 젓가락을 함께 넣을 수 있게된 네모진 첨사도가 있다. 칼의 크기는 모든 종류의 큰 것이 다섯치, 날 길이 세치, 작은 것이 세치에 칼 길이가 한치오푼으로 더 큰 것은 흉기라 하여 엄격히 금지되어 왔다.
일제 말 전남의 엄모지사가 당시의 장노인에게 8각도를 만들어내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내 비록 대강간 초부이기는 하나 나라 뺏긴 설움 어이한데, 왜놈앞잡이에게 8각도는커녕「막빼기」도 못 만들어 준다』고 버티다가 주재소에 끌려가 왜경에게 호되게 당한 일은 고려 때 칼을 만들어 바치라는 관가의 성화에 자기가 만든 칼로 스스로의 손목을 잘랐다는 어느 도공의 이야기만큼이나 광양에는 파다했다.
『나무면 모두 칼자루나 칼집인줄 알지만 5백년이상 된 대추나무나 수령 2백년이상의 감나무의 속심 산호 또는 우골이 아니면 될 수 없다 』니 장도의 희귀성이 이에서도 연유하나보다.『옛 스승처럼 정교하게 할 수는 없지만 요즘도 주문 받을라 치면 이틀은 걸려야 겨우 한 자루 뽑아낼까말까 한데…』예나 지금이나 한 자루 값이 쌀 한말 값, 수공비는 고사하고 참숯과 쇠 값에 겨우 미치는 정도라고 한다.
『시대는 줄달음쳐도 이런 것들은 그대로 남아 이어야하는데…』홀로 남은 현역 박씨는 자꾸만 옛 이야기를 더듬었다.

<글 정천수 기자|사진 양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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