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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초원 김석신 도봉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단원 김홍도나 긍재 김득신 같은 그 시대 선배화가들의 성명에 눌려서 자칫하면 초원의 이름은 희미해지기 쉬웠었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시각에서 초원 김석신의 수작들을 살펴보면 초원 그림은 복헌도 단원도 긍재도 아닌 초원자신의 청신한 「스타일」을 세웠던 사람임이 분명하다.
어찌 보면 겸재파의 여운도 풍기는 듯 싶고 거칠고 성근 듯 싶으면서도 시원스러운 화면포치 속에 암벽과 골산이 흔한 한국자연의 정취를 흥건하게 터잡아준 의미에서도 초원은 한번 다시 봐야될 화법을 남긴 사람이라고 할만하다.
초원은 복헌 김응환의 조카였는데 복헌에게 후사가 없어서 초원이 그 양자가 되었고 앞서 이름을 든 긍재 김득신과 일재 김양신은 그의 친형제간이어서 말하자면 초원은 화원의 집안에서 생장해서 자신도 화원으로 입신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양부 복헌이 작고한 해에 초원의 나이(1758년생)는 이미 32세였고 그의 형 긍재는 4살 맏이였었다.
따라서 초원의 그림은 그 양부와 현 긍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또 당시 복헌의 문하에는 성명을 떨치던 단원 김홍도가 있었는데 김홍도는 초원보다 13년이나 맏이였으므로 단원에게서 받은 감화 또한 컸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초원작품으로서 근래에 알려진 것 중에서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도봉산 계곡의 경승을 그린 『도봉첩』의 존재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의 흔연한 시흥이 맑은 담채 속에 넘나고 있어서 그의 붓 자국에서 느껴지는 쾌적한 감촉의 그 속도와 함께 화가로서 지니는 그의 품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도 하겠다.
초원그림이 보여주는 이러한 감각은 그의 산수의 특색을 이루는 동시에 그 무렵의 한국산수화가 도달한 하나의 새 경지였다고 보아도 과찬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초원은 화원집안에서 오래 지냈고 후에 사과 벼슬을 했다고 하나 졸년이나 그 후사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남는 것이 없다. <최순우 국립박물관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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