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91)| 피어린 산과 언덕 (15)|「노리」 고지 전투 (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격전이 거듭된 「노리」 고지의 산병호 속은 쌓인 적의 시체가 썩어 구더기가 발목까지 빠졌으며 교통호 속에서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포격에 메워져 버린 흙더미에 치여 중공군을 껴안은 채 그대로 서서 죽어 가기도 했다.
4개 사단으로 편성된 미 제1군단 내의 유일한 한국 군인 제1사단은 미 제2, 미 해병 제1, 영 연방 제1사단에 뒤질 수 없으며 또한 수도 서울로 이르는 관문을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임진강변의 제 전초 고지들을 사수하였다.
북진 때부터 계속 서부 전선에서 싸워 온 국군 제1사단은 이 지역 지리에 훤한데다 막강한 미군 화력과 「탱크」 지원을 받음으로써 중공군과의 고지전에서 개가를 올렸다.
미군 측에서는 강 건너의 조그만 진지들을 가지고 많은 전사·상자를 내면서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을 할 것이 아니라 임진강 이남의 주 저항선을 안전하게 방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52년7월 지리산 공비 토벌에서 돌아온 1사단은 그간 미군들이 잃은 전초 진지들을 모두 탈환하고 휴전까지 임진강 일대의 「노리」·「퀸」「베티」·171 고지 등의 공방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고지들은 피 흘린 보람도 없이 휴전 직전 주공군의 맹공격을 받고 빼앗겨 지금은 대부분이 군사 분계선 이북에 들어가 있다.
그러면 전회에 이어 「노리」 고지와 53년6월에 전개됐던 「퀸」·171 고지 전투 이야기를 당시 참전자들로부터 들어보겠다.

<닉슨 부통령이 방문, 격려해줘>
▲도상보씨 (당시 1사단 12연대 3중대 1소대장=소위·예비역 육군 대위·현 TBC 제작 2부장·47) <나는 12월13일의 격전이 끝난 후 「노리」 고지를 방어하러 들어갔었습니다. 52년11월14일에는 한국 전선을 시찰중인 「닉슨」 미 부통령이 우리 12연대를 방문, 격려해 준 일이 있어요. 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는 미군 포와 「탱크」 지원이 큰 힘이 된게 사실이에요. 당시 한국군과 미군은 화력 지원 협조 본부 (fscc)를 설치해 놓고 보전포 협동 작전을 긴밀히 조정했었지요. 우리가 확보하고 있던 소 「노리」는 밤이면 대 고지의 적병이 내려와 호 속에서 손목에 끈을 잡아매고 있는 병사들의 대공포판을 뺏으려고 해 서로 끌어 잡아당기며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어요. 두 고지는 이렇게 인접해 있어 강 이남에 주력을 둔 아군으로서는 적의 야간 공격 때면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군 측에서는 이곳을 포기하고 강 남쪽으로 철수하자고 한 모양입디다.
박림항 사단장은 이 같은 얘기가 나오자 소 「노리」 고지는 우리가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사수하겠다면서 적극 반대하더군요. 우리 좌우에는 영 연방군과 미 7사단이 배치돼 있었어요.
12월 중순 하루는 우리 연대장 정영흥 대령이 오더니 『도 소위 소대가 나가 소「노리」 고지를 방어하라』고 하데요.
나는 이때부터 4개월 동안을 이 고지에서 두더지 생활을 한 겁니다. 나가 보니 호들이 거의 다 포격에 무너져 버렸더군요.
막힌 교통호를 파다가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중공군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죽어 있는 시체를 몇 구 발견했어요. 간혹 남아 있는 호 속에는 구더기가 꽉 차 있어 발을 넣을 수가 없구요.

<중공군 껴안은 채 죽은 사병도>
나는 중공군을 안고 죽은 사병의 시체를 보고 이들이야말로 참된 애국자였다는 걸 느꼈어요.
밤중에 순찰을 나가 돌고 있는 듯한 동초병을 깨워 보면 어느 사이에 적 총탄을 맞고 죽어 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한번은 적이 달라붙기에 진내 포격을 요청하고 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보니 위생병 한 명이 없습디다.
건너편 골짜기에서 그 위생병이 중공군한테 끌려가면서 『소대장님. 소대장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그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데 정말 못 견디겠더군요. 하는 수 없이 무차별 사격을 시켰어요. 사격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봤더니 부르는 소리가 들릴 듯 말듯 하더니 영영 사라지고 맙디다. 다행히도 그 사병은 후에 포로 교환 때 송환돼 왔어요.
나는 53년3월 하순에 이 고지에서 나왔는데 수염이 둘째 단추까지 내려와 「털보」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수염을 깎고 나니까 대원들도 전혀 몰라보더군요.
나는 소「노리」 고지 방어의 전공으로 금성 화랑 무공 훈장을 받았습니다. >
「노리」 고지 쟁탈전 후에도 1사단은 317·199·박·백두산 고지 등 피아의 전초진지와 감제 고지들을 둘러싼 중공군과의 공방전을 계속했다.
특히 적은 이 같은 공방전 끝에 53년6월 하순 서울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휴전 반대 「데모」와 들끓는 국민 여론의 기를 꺾어 보자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서울과 제일 가까운 국군 1사단 지역 내의 171·박·「퀸」 고지 등에 맹 포격을 앞세운 공격을 가해 왔다.
▲김동빈씨 (당시 1사단장=준장·예비역 육군 중장·현 사업·49) <53년5월3일 1사단장으로 부임해 전선을 돌아봤더니 171·「퀸」 고지 등을 맡은 15연대의 방어선이 약간 허술하더군요.
그런데 미8군 정보에 의하면 적의 공격 방향이 이들 고지 쪽을 향하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미1군에서 「트럭」 40 대를 지원 받고 사단 본부 요원들까지 동원시켜 50m 폭의 철조망을 치는 등 15연대의 방어 진지를 재정비했습니다.
6월 초순부터 적이 보급품을 계속 수송하고 병력을 집결시킨다는 정보를 직접 확인해 보고 중공군의 대공세를 예상했었지요.
6월25일부터 적의 본격적인 포격이 시작됩디다. 내가 6·25 쟁 동안 당한 포격 중에서 가장 심한거였어요.
적의 포격은 우리 1사단 쪽만 집중적으로 가해졌는데 이건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군의 사기를 꺾고 협정 조인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공산 측의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였어요. 이 일대 다른 「유엔」군 지역엔 전혀 적의 포격이 없었어요.
15연대 전초였던 171과 「퀸」 고지를 적한데 뺏기고 나니까 「데일러」 미8군사령관이 독전차 사단사령부로 달려오더군요. 「테일러」 장군은 『「퀸」 고지를 탈환할 생각은 말고 현 방어선을 지키기만 하라』고 명령합디다. 이래서 우리는 탈환전을 단념하고 방어선을 구축해 주 저항선을 지키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나는 우선 ①「퀸」 고지서 주 저항선에 이어지는 산허리를 잘라 도랑을 깊게 파 지뢰를 매설해 놓고 ②밤에는 「지프」 25대를 동원, 올라갈 때는 「라이트」를 켜고 내려 올 때는 끄게 해서 1백m 간격으로 계속 돌게 해 우리 방어 진지에 대한 대량 보급을 위장하고 ③고지마다 1개 분대씩의 병력을 올려 보내 작업을 시켜 후방 진지 공사가 활발한 것처럼 해서 감히 적들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겁을 줬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중공군은 공격 방향을 서쪽 11연대 정면의 「베티」 고지로 바꾸더군요.>

<휴전 앞두고 긴장 풀린게 허점>
▲장춘권씨 (당시 1사단 참모장=대령·예비역 육군 소장·48) <중공군의 「퀸」 고지 공격은 내가 참모장으로 간지 15일만인 53년6월25일부터 시작됐습니다.
25일 하오 4시께 작전 회의를 열고 있는데 갑자기 적 포탄 2발이 사단 본부 후방에 떨어집디다. 그래서 우리는 적이 강 건너의 「노리」와 「베티」 고지를 공격해 올 것으로 추정하고 모든 포문을 그쪽으로 돌린 채 「퀸」 고지 쪽의 경계는 소홀히 했지요. 그러나 적은 이날 밤 임진강을 도하, 「퀸」 고지로 달러 붙었어요. 완전히 적의 기습을 당한 셈이었지요.
어처구니없이 고지를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성할 점이 많았습니다.
사실 당시 우리 지휘관들이나 사병들은 서울이 너무 가깝고 충분한 보급을 받고 있으니까 긴장감이 약간 풀려 있었어요. 그래서 이 같은 적의 공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방어 태세를 제대로 못 갖췄던 거예요.
나는 얼마 전부터 일선 경계를 철저히 하고 철조망을 5중으로 쳐 놓으라고 독려했었는데 이게 잘 안돼 있었어요.
중공군이 달러 붙은지 1시간만에 「퀸」 고지가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고 「지프」로 달려나가 보니 연대 저항선의 철조망은 겨우 한 겹뿐이더군요.
물론 진지 구축에는 시간도 필요했고 또 당시 휴전 기운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겠지만 좀 미비한게 사실이었지요.
화가 치밀길래 나는 대대장을 군법 회의에 돌리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퀸」 고지를 빼앗기고 얼마 안돼 「노리」 고지도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 버린 채 휴전이 조인되고 말았어요.>

<중공군, 두더지 작전으로 기습>
▲한효석씨 (당시 1사단 12연대 3대대 작전관=중위·예비역 육군 소령·현 중앙일보 예비군 대대장·43) <원래 「퀸」 고지는 미7사단 1개 중대가 방어를 하고 있다가 중공군에 빼앗겼던걸 우리 한국군이 다시 탈환해서 2개 중대 병력이 들어가 있었어요. 중공군은 한동안 잠잠하더니 그 사이에 고지 밑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와 대대 병력을 은폐시켰다가 6월25일 기습을 감행한 거예요.
고지의 아군들은 밤에 중공군이 땅속을 파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대단케 여기질 않았던 모양이더군요.
기습을 당한 아군은 상당수가 포로가 됐고 중대장도 한 명만 살아났어요.
199고지의 우리 대대 OP로 올라온 그 중대장은 온몸이 피투성인 채 김자열 대대장을 붙들고 울면서 기습을 받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하데요.
자기는 중대 OP호 속에 있다가 중공군이 올라 오길래 입구를 연락병과 함께 막아 버리고 이틀 동안 숨어 있다 옆으로 굴을 다시 뚫고 빠져 나왔다는 거예요. 새벽에 호 속서 뛰어 나와 고지 밑으로 마구 뒹굴어 내려오는데 적의 집중 사격을 받아 연락병은 전사하고 자기만 살았다는 겁니다. 이후부터 중공군의 「두더지 작적」을 막기 위해 수색을 고지 밑까지 철저히 했어요. 이때 우리 대대에는 좀 모자라는 「바보 병사」가 하나 있었는데 수색을 나갔다가 적에 포로가 돼 중공군 중대장 당번 병 노릇을 하다가 이틀만에 다시 돌아왔었어요. 아마 저능이니까 적도 감시를 소홀히 했던 모양이지요. 그 병사는 와서 하는 얘기가 중공군 「높은 사람」을 봤는데 호 속에는 팔뚝 같은 초를 켜 놓고 있더라는 거예요.>
◆주요일지 (1952년7월1∼4일)
※1일 ▲「유엔」 안보리, 세균전 토의에 중공과 북한을 참석시키자는 소련안 부결 ▲영 하원 노동당이 수풍 폭격 문제로 제출한 정부 불신 안 부결
※2일 ▲국회의원 출석을 독려 ▲수풍 폭격 문제 미 의회서 청취회
※3일 ▲3만 5천의 공산포로를 4개 섬에 분산 수용 ▲국회 개헌안 토의
※4일 ▲「미그」기 12대 격추 ▲국회, 발췌 개헌안을 1백63대령으로 가결
◆정정=본 연재 390회의 박림항씨 증언 중 휴전 회담 「방안」은 「분위」로, 증인 황병식씨는 황병도씨로 각각 바로 잡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