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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제자 이지택>|<제28화>북간도(23)|이지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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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상흥의 순국>
이 무렵에 유행한 노래에 독립군 용진가가 있었다.
①요동·만주 넓은 들을 쳐서 피하고/여진국을 개국하옵신/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 대로/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나가세 전쟁 장으로/나가세 전쟁 장으로/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청년들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삼천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하는 용감한 가사로 4절까지 있었다.
이 같은 노래는 학생들만이 아니고 농부도 아낙네도 흔히 불렀다.
전회에서 말한바 있는 조흥렬씨(67)같이 총을 운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노래로 힘을 더욱 얻었던 것이다. 독립운동 뒤안길엔 이런 일로 목숨을 건 동포들이 무수했다. 총력전인 것이다.
지금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지경리에서 농사짓는 조씨의 경우-. 조씨는 연길현 마록구 송림동에 살았다. 그때 나이 15∼18세. 이 마을은 용정 북쪽 40 리 지점으로 주민은 약 40가구였다.
하루는 5촌숙 조두용(용정 일본총영사관을 불태운 독립군)이 어디 갔다 오더니『너 심부름 갔다 와야겠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하니 품에서 권총 3자루를 꺼내 이를 보자기에 싸면서『이것을「번치꺼우」로 갖고 가라』고 했다.
「번치꺼우」는 약 50리 떨어진 고장이었다.
조두용은『그곳에 가면 개울이 있다. 개울가에 큰 버드나무가 있는데 나무 밑에 삿갓 쓴 사람이 기다릴게다. 삿갓 위에 흰 수건을 걸치고 있을 터이니 그 사람에게 이것을 전하라』 고 했다.
조흥렬이 오솔길을 따라가니「번치꺼우」에 도착한 것은 이미 저녁 때였다. 알려 준대로 갓 쓴 사람이 흰 수건을 걸치고 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그는「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얼굴을 보지 못했다. 총을 건네주자 그 사람은『너 수고했다. 이것이 나라의 일이다』고 했다. 두 번째는 같은 장소, 같은 사람에게 권총 4자루를 또 운반했다.
세 번째는 40 리 떨어진 태평구라는 곳에 장총 1정을 날랐다. 볏짚에 넣어 메고 갔다.
이 마을은「돌문안」이란 별명이 있고 집이 4, 5채 있었다. 개울바닥에 큰 바위가 있는데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이 기다린다고 했다. 손에 낫을 들고 있을 거라고 했다.
알려 준대로 여서 전했다. 네 번째는 연길현 관재둔으로 권총 5자루를 날랐다. 이 마을은 송림 동에서 60 리나 떨어져 상당히 멀었다.
집이 l백여 채나 있었는데 그중 집 3 채가 강변에 떨어져 있었다. 역시 흰 수건을 머리에 질끈 두른 낫을 쥔 사람이었다.
이 조씨는 다섯 번째에는 송림 동에서 40 리 북쪽인 봉림동 상 촌에 권총 5 자루, 여섯 번째는 장총 8정을 전했다.
그런데 이 총을 받은 사람은 변장을 했을 뿐 언제나 같은 사람이었다. 목소리가 똑같았다.
그런데 이 총은 김약연의 심복들이「러시아」에서 사 오는 것이었다.
일곱 번째엔 6촌인 조용갑씨와 둘이서 장총을 4정씩 지고 밤중에 갔다.
그러다가 여덟 번째에는 아버지인 조두왕씨와 함께 돈 화까지 총을 갖고 갔다가 1개월만에 돌아왔는데 뒤에 알고 보니 총을 받은 사람이 김좌진부대였다. 이어서 장총 4자루와 실탄 3백발을 날랐다.
이때 처음으로 여덟 차례에 갈 쳐 총을 받은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달밤이었는데「그 사람」은 갓과「마스크」를 벗고「수고했다」고 말했다. 이마가 벗겨지고 콧날이 우묵했다.
이보다 조금 늦은 21년 께에 이중만과 김윤신이 용정에서 부유 상점이란 가게를 내고 있었다.
이들은 규암재 1회 동창으로 합자로 상점을 열고 주로 면포와 신발류를 취급하고 있었다. 하루는 이중만이 그때 말로「지까다비」80켤레를 갖다 놓았다. 독립군에게 전하란 것이었다.
이때 따로 강재후란 개성출신 인사와 진주원이란 사람은 덕흥태 상점에서 현금 70원, 광목·신발을 밤중에 보내 오곤 했다. 이것들을 조씨가 마대에 넣어 갖고 연길현의「닭덩대촌」으로 날랐다.
1919년 10월말께로 그때는 회색두루마기에 검은 방한모를 쓴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그 사람」이었다. 이것이 조씨가 보급한 마지막이 되었다. 이를 받은 독립군도 최후였다.
조씨가 이를 전달한 후 3일 후에 이 독립군이 전사한 것이다. 사살된 뒤 그의 이름이 정상흥 임이 밝혀졌다. 정은 함북 어랑 사람이었다.
이 굳건한 독립군을 죽인 것은 현시달 경부가 이끄는 친일한국인 밀정과 경찰대였다.
현시달에게 정상흥을 밀고한 것은 정상흥과 친했던 최남욱이란 자였다. 최와 정은 같은 고향사람이었으니 분통한 일이었다.
최의 밀고에 따라서 현시달은 20여 명의 경찰을 끌고「닭덩대촌」으로 나가 정이 숨어 있는 집을 포위했다.
『손들고 나 오라』고 소리쳤으나 정은 끝내 항거해서 1대20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정은 오래 전부터 이「닭덩대촌」을 근거로 사방에서 총을 모아 김좌진부대에 공급해 오는, 말하자면 병참담당자였던 것이다. 정은 따라서 용정·명동·국자가 등지의 한국인과 연결, 자금·무기를 수집했던 것이다. 뒤에 안 이야기지만 정은 3백발의 총알을 갖고 있어서 이날 포위되자 밤새껏 항전했다. 명사수로 왜경 앞잡이 7,8명이 다치고 죽었다. 현시달은 마침내 이 초가에 불을 질렀다.
정은 할 수 없이 뛰어 나와 총을 쏘다가 장렬한 전사를 한 것이다. 정이 전사하자 현시달은 이 초가의 가족을 몰살시켜 버렸다.
이 무명독립투사의 충혼은 지금껏 알아주는 사람 없이 고 혼으로 헤매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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