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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의 신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신데렐라」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데렐라」를 불쌍하게 여긴 요술장이 할머니가 「신데렐라」에게 옷을 입히고, 무용회에 나갈 수 있게 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동화엔 이상한 점이 둘 있다. 하나는 자정이 되자 「신데렐라」가 입고 있던 값진 옷들이 모두 평소의 누더기로 돌아갔는데, 벗겨진 신발 한쪽만은 그대로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신데렐라」가 신었던 유리 구두는 오래 춤을 추기엔 너무 발이 아프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먼저 점은 사실성을 무시하는 어린이의 동화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일종의 의심이다. 그러나 두 번째 점은 다르다. 「신데렐라」가 신었던 신발이 유리였다는 것을 아무도 의치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유리가 아니라 모피신발이었다. 그게 잘못 번역된 채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모피신발보다는 유리구두가 더 환상적이며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잘못된 번역이 오히려 잘됐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번역의 생명은 원문의 뜻과 「뉘앙스」를 충실하게 옮기는데 있다. 문학작품의 번역이 가장 어렵다는 것도 이런데 까닭이 있다. 『나는 그러나…』할 때나, 『그러나 나는 …』할 때나, 별로 뜻이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나…』라고 작가가 쓴 데에는 각별한 뜻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을 『그러나 나는…』과 똑같은 뜻으로 번역하면 그만큼 글의 「뉘앙스」나 본문을 왜곡시켰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서독의 「뵐」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외신보도가 있은 지 며칠 안돼서 벌써 그의 작품들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늘 있는 일이지만,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빨리 책이 나올 수 있으려면 밤을 새워가며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자연히 숱한 오역이 생기기 마련이다.
오래 전에 일본의 원포일암이라는 번역가가 라는 말을 『궁지에 몰린 사자』라 하지 않고 『만두에서 짖는 사자』라 번역한 적이 있다. 후에 그게 오역이라고 지적되자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좀 편집이 지나쳤다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좋은 교훈이 될게 틀림없다.
기왕에 출판되었거나 발표되었던 것도 표지만 바꿔서 내놓은 약삭빠른 상혼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노벨」수상작가가 됐다해서 뒤늦게 덤벼드는 독자층에게도 허물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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